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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 Oct 23. 2020

사소로운 것

무엇이든 입력하세요

글쓰기를 손에서 놓은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도저히 방송 일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방송작가를 그만둔 이후로 나의 상업적 글쓰기는 완전히 멈추었다. 재미 삼아 쓰던 인터넷 글쓰기 또한 짧은 호흡으로 단편적인 일상만 늘어놓는 것이 전부다. 결혼 후 호주에서 약 4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 경력은 사실상 단절이었다. 그래도 글쓰기라는 건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친구가 두어 번 물어다 준 간단한 일거리 정도는 해낼 수 있었지만, 사실 프리랜서로 활동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커리어는 감히 구직활동에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이 인터넷상에는 어마 무시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섣불리 그것들에 도전하지 못했고, 그대로 정체되었다. 글쓰기라는 내 최초의 꿈은 잠시 뒤로 하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글쓰기 외의 것들을 해보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사실은 대학시절부터 나는 분명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내 안에 잘 다져놓았는데, 어느 순간 나는 '루저'가 된 기분에 사로잡혀 우울을 떨쳐낼 수 없었다. 분명 내게도 소중하고, 나를 만들어가는 내 자아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해버렸고, 곧 나의 감정을 소홀히 대했다. 내 감정을 내가 무시하니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심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다 탈진해버렸다.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차라리 죽어버릴까, 같은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곧 글이 쓰고 싶어 졌다. 활자가 그리워졌다. 읽고, 쓰고, 그것들을 입 밖으로 소리 내는 것이 그리워졌다. 그러자 인간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났다.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끝없는 철학적 호기심이 들끓었던, 바로 그 나이의 내가 생각났다.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그저 헤매기만 했다. 글을 써 내려갈 플랫폼을 정하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소설을 써야 하나, 내 얘기를 써야 하나, 뭘 써야 하나는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플랫폼을 정했는데, 무엇을 써야 하나를 벌써 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학생 시절,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자. 의식의 흐름대로. 내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글자들을 그대로 적어 내려가 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참으로 우습게도 '누군가 내 글을 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글자 그대로를 적을 수 없었다. 주어진 주제 없이 쓰고 싶은 것을 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나는 사소로운 것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사실은 사사로운 것이 맞겠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사적이고,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요즘 시대에서는 어찌 보면 TMI 같은. 사사로운 것보다 조금 더 소소한. 그래서 사소로운 것. 그런 것들을 적어나가다 보면 무엇이 나를 채우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사소로운 것들로 가득 찬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아름다운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소로운 것들을 써 내려가 보려고 한다.


사진을 찍고, 여행을 가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요가를 하는. 이 사소로운 것들을 뭐라 명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활자에 대한 갈증을 풀어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었으리라. 정해진 규칙 없이, 그 어렵다는 자유로운 양식과 주제를 가지고, 누군가가 이 글을 읽게 되는 그 날까지, 아니 너무 거창한가? 시작이 거창하고 끝이 미약하더라도(?) 그 미약한 끝마저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써보자. 이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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