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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톡 주인장 Apr 20. 2024

주방에는 엄마의 젊은 시절이 담겨 있다

90세 엄마가 쓸모를 입증해야 하는 이유

엄마의 살림살이를 버리는 불경죄


“그 멀쩡하던 걸 왜 버리고 새 걸로 바꾼 거야? 이건 무겁고 좋지도 않은데.” “너는 내가 쓰던 건 다 갖다 버리더라.” 아, 또 시작이다. 설명하지 말자. 정색하지 말자. 먼저 마음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가능하면 몸도 피하자. 커피포트를 꽂으면서 시작된 엄마의 고정 레퍼토리, 말리면 안 된다. “이러다 나도 갖다 버리겠다!” 로 비약하기 전에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그건 또 왜 들고 나가는 거야!! 내가 버리려고 하는데.” 아, 맞다!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일이지. 오늘 영 핀트가 어긋나네....


회사를 그만두고 살림을 맡은 게 벌써 10년 가까이 된다. 엄마는 나이 드시고 나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살림이란 게, 자질구레 해야 할 일의 리스트가 꽤 길다 보니 잘 하려고 들면 끝없는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식구도 적은데다 딱 기본만 하는 내게는 별로 힘든 분야는 아니었다. 초기에는 살림주도권을 이양한 엄마와 별 문제가 없었다. 나름 합당한 잔소리를 듣는 정도였다. 그러다 5년 여 전 엄마의 인지장애가 생기면서 갈등 국면에 돌입하고 말았다. 


가장 흔히 발생하는 건 당신이 쓰던 살림살이가 사라졌다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를 나무라시는 것이다. 오래 써서 접촉이 불량해진 커피포트, 가스불에 손잡이 부분이 녹아서 나사가 헐렁거리는 압력밥솥, 나물 등을 삶을 때 주로 쓰는 오래된 양은냄비 등을 교체하고 난 뒤 엄마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도 못 해보고 번번이 당해야 했다. 본인이 직접 버린 항아리도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때는 역모의 누명이라도 쓴 듯 억울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어쩌겠나. 설명을 해봤자 인정도 안 하실 뿐 아니라, 다음 번에도 처음인 양 같은 말을 또 하신다. 


‘내가 쓸 땐 멀쩡했다, 멀쩡한 걸 네가 맘대로 버렸다, 내가 쓰던 물건을 함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기적의 논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값 나가는 집안 보물이거나 추억이 깃든 특별한 물건도 아닌, 고작 낡은 살림살이일 뿐이다. 별로 소중하지도 비싸지도 않은 물건인데 엄마는 자신과 동일시하며 마치 자신이 거부라도 당한 양 여기는 모양새다.


나물 다듬기를 통한 자기 효능감


살림을 둘러싼 또다른 트러블은 당신과 다른 살림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페트병 라벨을 떼고 용기를 씻어내 놓는 나의 쓰레기 분리수거를 유난스럽다 핀잔주고, 딱 한 숟가락 남은 먹던 밥도 못 버리게 하고, 3월 제주 햇감자와 딸기의 존재를 거부한다. 오이를 끓는 물에 잠깐 튀겨서 오이지를 담그고, 당근채를 올리브오일과 식초에 절이는 음식 따위는 영 이상한 일일 터이다. 늘 잔소리를 듣다 보니 나도 엄마의 주방 진입을 달가워하지 않게 됐다. 기억력 저하와 함께 안 하니까 더 못하는 악순환을 겪으며, 그렇게 엄마는 주방에서 멀어졌다.


그 날은 무슨 마음이 동했는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면서 냉이, 미나리 등 봄나물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된장찌개에 봄나물 운운하는 엄마의 밥상 타박을 못 들은 척 했지만, 엄마의 발화는 늘 자식들의 머릿속 어딘가를 떠돌게 마련이다. 나의 살림 생산성은 도통 개선의 기미가 없는 바, 막상 나물을 꺼내 놓으니 다듬을 일이 하세월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에게 슬쩍 내밀었더니, 의외로 반색을 하신다. ‘누가 먹는다고 이렇게 나물을 많이 샀냐, 아직 제철도 아닌데 왜 샀냐’는 지청구가 동반되었지만, 엄마는 모처럼 밝은 표정을 띠었다. 일상이 늘 불만스럽고 무기력했던 90세 할머니는 ‘나물 다듬기’를 통해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지셨다.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엄마에게 주방은 원래 당신의 공간이었다. 오랜 세월 그 공간을 주도하고 ‘자기 효능감’을 발휘하며 자신의 쓸모를 입증해오신 장소였다. 자식 넷을 밥상에 둘러앉히고 도시락을 싸고 반찬 한 가지라도 더 해먹이려고 종종거렸던 젊은 시절의 엄마가 거기 있었다. 그랬는데 자신은 나이가 들어 밀려나고, 평생 학교와 직장만 다녔던 못 미더운 딸이 주방을 꿰차고 당신과 다른 방식으로 살림을 해내는 게 못마땅했을 터이다. 


‘불자인 내가 기도도 안 하고 차려주는 밥이나 먹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구나’ ‘나이 많아도 사람이 갈 데가 있고 할 일이 있어야지, 이건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한탄을 하실 때마다, 듣기 싫었다. 아직 건강 괜찮으셔, 같이 사는 딸 있어, 연금 나와, 아들 며느리들 착하고 사이 좋아, 손주들 공부 잘 해, 왜 저렇게 감사가 없고 매사 불만이 많으신 걸까 생각해왔다.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할까? 


세상사, 이해하기 어려운 일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엄마를 둘러싼 객관적인 환경은 별로 나무랄 데 없지만, 정작 당사자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필요와 쓸모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유난히 자존심 강하고 성취지향적인 엄마에게서 자기 효능감이 사라진다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겠다. 그래서 엄마는 자기 자신과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나 보다. 


엄마에게 자신의 쓸모를 보여줄 적당한 일거리를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고작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나 주말 분리수거(솔직히 동네사람들이 욕하지 않을까 신경 쓰이기도 한다), 나물 다듬기 따위이지만 말이다. 그사이 나는 엄마가 분실한 쓰레기 배출 카드를 다시 만들고, 한 숟갈 남은 밥은 ‘음쓰’ 바닥에 깔아서 안 보이게 하고, 멀쩡한 택배 박스는 몰래 버리고, 나물류 등은 맨날 농사짓는 후배가 보내준다고 거짓말을 늘어 놓는다. 여전히 짜증과 목소리 높이기가 동반되기도 한다. 


엄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안타깝다. 90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일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어하는 엄마의 존재증명 방식이, 그걸 충족하지 못하고 느끼는 불만과 부정적인 태도가, 그런 엄마의 자존감을 높여주지 못하는 요령 없는 내 자신이... 당신은 그저 건강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맞아만 주시면 충분한 건데, 그러면 나도 엄마도 더 행복해질 텐데... 엄마도 자기 자신이 맘대로 안 되겠지.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겠지. 


엄마가 달라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 마늘이나 콩 까기, 나물 다듬기, 뭐 그런 아르바이트 거리를 찾아봐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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