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의 그림일기

by 유정

나의 첫 그림은 이혼 후 집을 나갔던 엄마가 잠시 집에 돌아왔을 때다. 딸 셋을 남자 손에 맡기고 나갔다가 다시 온 집은 황폐했을 게다. 여자아이들은 들풀처럼 자라 있을 테고, 가장 어렸던 나에게 아마 가장 미안한 마음이었을 게다. 나를 임신했던 시기는 아빠의 사업이 무너지던 시절이라 궁핍해서 제대로 먹지 못했고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잦은 부부싸움과 가난에 제대로 먹지 못했고 이후 집을 나갔기에 나는 딸 셋 중에 가장 작다. 엄마는 그걸 자신의 탓으로 생각했던 모양인지 집에 돌아온 이후 유독 나에게 예쁜 옷을 사 주고 아빠에게만 주는 비싼 갈치 반찬을 먹게 해 주는 특권을 누리게 해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있는 집 자식들만 다니던 학원에도 보내 주었다. 물론 엄마는 몇 년 후 다시 나갔기에 그게 마지막 학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엄마가 보내준 학원이 미술과 피아노였다. 당시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교육이다. 엄마는 하얀 양산을 쓰고 제철 수박이나 딸기를 사들고 나를 맡긴 미술학원 겸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을 찾아와 나를 잘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난 그 시절 초등학생이었기에 그때는 몰랐다. 왜 원장선생님이 유난히 예뻐해 주셨는지, 그리고 방학이면 아침 9시부터 학원이 마치는 저녁 6시까지 종일 있어도 싫은 내색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하고 선생님들과 점심도 먹게 했는지.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그림을 배운 듯 하다.


그때까지 공항이나 바닷가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내게 공항 그림이나 바닷가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을 때는 고집스럽게 하얀 스케치북을 보며 버틴 기억이 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그릴 수 없었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어서 스케치북을 몇 시간째 노려보며 울먹였다. 그런 나를 다그치지 않고 원장님은 가만히 기다려 주셨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싸움이 지난 몇 시간 후, 원장님은 나에게 예시로 그려진 그림을 건네시면서 그걸 보고 그리라고 하셨다. 처음부터 건네지 않으심으로써 원장님은 나의 그런 내면의 싸움을 기다려주신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그린 그림 이외에,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 생각을 거슬러 보면 책들을 읽다가 우연히 그린 ‘자화상’이 아닐까 싶다. 물론 책이 나를 그림으로 이끈 건 아닐 게다. 나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책에 손을 뻗게 했고 그 책 중에서도 자화상이라는 주제에 마음이 끌렸고 그리고 책 속의 그들처럼 그림이라는 또 다른 소재로 나를 만나고 싶어졌던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은 그림에 대해 완전히 초보이고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의 그림일기다. 글이 세상에 전부라고 믿고 살아온 나라는 사람이, 글이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글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그리고 오랜 마음의 외로움과 우울함을 이기기 위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발버둥친 결과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비록 찾지는 못했지만 삶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가느다란 끈이 되어주길 희망하며 그린 그림이고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처럼 삶에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누군가가 있다면 비전문가인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위로를 얻고 그들도 기댈 수 있는 무언가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글을 묶어 책으로 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