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덩 작가의 논어 관련 세 번째 책이다. <나는 불안할 때 논어를 읽는다>, <나를 살리는 논어 한마디> 그리고 이 책이다. 논어에 관해 이렇게 집중적으로 읽은 건 내가 기억하는 한 판덩 작가의 글이 대부분이다. 번역서이고 논어라는 어려운 주제지만 그의 글은 쉽게 읽힌다. 번역의 질이 높은 점도 있겠지만 문외한이 내가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논어에 보인 사랑과 진심,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 배움의 기쁨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이나 표정에서는 빛이 난다. 향기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의 기운이 풍긴다. 열정적으로 쓰인 책에도 나는 똑같은 느낌을 받는다. 공자에 대한 존경과 감탄, 사랑까지 느껴지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본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배움의 힘을 굳게 믿고 있다. ‘판덩독서’를 여러 해 동안 운영하면서 여러 강연회에서 매번 다양한 주제로 강연했지만 목표는 단 하나였다. 바로 ‘배움의 힘’이다. 배움은 생활을 바꾸고 인성을 발전시켜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p185)”
배움의 힘이라고 작가는 표현했지만 나는 소제목으로 배움의 ‘기쁨’이라고 썼다. 그건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이 ‘‘기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 책을 만날 때면 언제나, 매번, 처음인 듯 설렌다. 논어도 잘 모르고 공자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나지만, 그의 글을 통해 논어와 공자를 조금씩 알게 되며 그가 논어와 공자를 바라보며 행복해 하듯 나 또한 행복해하고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배움의 과정은 항상 직선으로 상승하지 않는다. 오히려 임곗값을 돌파하면서 성장한다.(p251)”
“우리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배움에 전념할 수 있으면 좋겠다.(p253)”
임곗값이란, 99도에서는 끓지 않던 물이 100도가 되어 끓게 되는, 그 마지막 1도를 의미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무의미하고 변화도 없고 소용도 없다고 느끼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내밀었던 그 마지막 한 걸음, 그럴 때 성장이 이루어진다. 성장의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공부해도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지치고 포기하고 싶어지곤 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만 깊게 뿌리가 내리고 있다. 그걸 믿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배움에 전념’하라는 표현을 쓴 것일 게다.
노력한다고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그러나 그 노력이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뻔한 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참 오래 걸렸다. 지금도 가끔은 노력하다 지치면 인생에 삐지듯 다 소용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그걸 난 믿는다.
# 깨달음의 기쁨
예기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찌르는 문장들이 나타나 읽는 속도를 멈추곤 했다. 걸음이 멈출 때마다 생각하게 되고 감탄하고 깨달음의 기쁨을 느낀다.
“‘공손’과 ‘공경’은 차이가 있다. ‘공손’은 자신에 대한 것이고 ‘공경’은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다.(p144)”
공손과 공경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막연하게 둘은 같은 것이며 모두 타인을 향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읽고 아! 라는 감탄과 함께 계속 곱씹게 된다. 공손한 태도를 갖는 것과 공경을 표하는 것, 이렇게 쓰고 나면 위의 문장이 더 잘 이해된다. 맞다. 그랬다. 나는 A에게 공손하게 대했는데 왜 이렇게 무례하게 대할까? 라든가 하는 생각은, 나의 공손이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가지게 되는 의문이었다. 공손함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내가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기에 한 것이지 무언가를 얻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교양에 관한 다음 문장도 이와 같다.
“교양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서 이득을 얻는 사람도 자신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자기 내면의 수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다.(p245)”
예의 바르고 교양 있고 공손하게 대해서 이득을 얻는 것은 나이며, 그로 인해 만족하는 것도 나다. 나를 위한 공손이고 교양이었던 것이다. 이를 깨닫게 되면 나의 공손이나 교양과 무관하게 무례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공자는 우리에게 단점이 있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단점과 단점이 합쳐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단점이든 그 자체로는 치명적이지 않다. 하지만 다른 단점과 합쳐져서 위력이 강해진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p196)”
단점에 관한 위의 문장도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장점도 단점도 모두 그대로 인정한다든가, 단점을 없애려 노력하기보다는 장점을 살려라,든가 하는 식의 문장은 많이 있다. 그러나 단점과 단점이 만났을 때의 파괴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지하면서 성실하지 않다’면 무식하면서 배우지도 않게 된다. ‘호기스러우면서 곧지 못하다’면 겉으로는 호방한 척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좁아 사소한 것들도 마음에 담아두는 작은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공자는 굉장히 싫어하고 해결방법이 없다고 한다.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지만 장점도 있으니 괜찮아, 라고 그동안 위안을 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가진 단점과 그 단점을 더 극단적으로 만들 단점은 없는지, 나를 돌아보게 된다. 무지하면서도 성실하지 않아서 무식하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나를 돌아보고 싶다.
“공자는 함부로 추측하지 않고, 독단적이지 않고, 고집하지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함부로 추측하지 않고 독단적이지만 않으면 자신의 견해만 고집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p225)”
마지막으로 새기고 싶은 문장 중 하나는 위의 구절이다. 공자가 절대로 하지 않으려 했던 것 네 가지다 추측, 독단, 고집, 아집이다. 독단이나 고집, 아집은 그럴 수 있겠다 여겼던 것들이지만 ‘추측’도 하지 않는다고 공자는 말한다. 나에게 있어 추측은 배려라고 생각했다. 미루어 짐작하며 공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측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추측이 ‘함부로’와 만나면 독단이 되고 고집이 되고 아집이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안다’는 믿음과 착각이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 세상은 살 만한가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마무리하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이러니저러니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뜻대로 되는 일도 별로 없고 불안하기만 한 미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울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현재 그대로 머물지 않을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이, 인생이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이 살 만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