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인돌출판사(2022)
헤세는 나의 청소년기를 함께 한 친구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머릿속 생각들에 혼란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는 늘 밝고 유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수많은 생각들에 압도당해 숨이 막혔다. 그 생각들의 근원이 무엇이며 출구도 모른 채 그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대상도 없는 상태로. 그때 그런 나의 혼란을 함께 해 준 것이 헤세다. 헤세의 수많은 저서들은 나의 혼란들을 이해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한다. 나의 청소년기를 함께 한 친구라고.
이 책은 헤세의 책에 관한 수필이다. 일기를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라 더욱더 인간적이다. 수많은 대작을 남긴 헤세가 알려주는 참된 독서란 무엇인지, 작가는 어떤 사람인지, 소장해야 하는 책은 어떤 책인지 등 책에 관한 그의 솔직한(난 항상 헤세의 글이 솔직하게 들린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글이 담겨 있다.
# 책을 대하는 자세
책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헤세는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14)
‘온 힘을 기울인다’는 표현이 중요하다. 헤세는 강조한다.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독서는 의미가 없다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p15)”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헤세를 만나본 적은 당연히 없지만 그의 소설을 통해 느낀 그대로 그의 수필도 진지하고 성실하단 생각이 든다. 책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런 헤세를 보며 왠지 위안을 느낀다. 매사 진지한 것이 나의 단점이라 생각한다. 매사 그렇다. 농담을 해도 농담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들을 정도니까. 헤세의 책이 나에게는 그랬다. 그냥 넘겨도 되는 것들에 대해 그는 끈질기게 붙들고 고민하고 고뇌한다. 물론 나에게도 그냥 넘겨도 되지 않는 것들이기에 그의 책이 좋았다. 독서도 그렇다. 나는 책에 대해서도 까탈스럽다. 그러려니 해도 되는 내용임에도 왜?라는 의문을 던진다.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p129)”
이것이 내가 책에 대해 유난스러울 만큼 까탈스러운 이유다. 한 권의 책은 한 명의 사람이다. 한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그 사람의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장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해하고 싶어서다. 반대로 마음이 통하는 책을 만나면 너무 행복해진다. 평생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쁨에 젖는다. 그런 책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이런 책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고르고 책장을 연다, 언제나.
# 글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가 괴테나 톨스토이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 단계에 단 한번만이라도 머물러 보라.(p233)”
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인간만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손이 없어도 펜이나 종이가 없어도 글을 쓸 수 있다는 헤세의 말이. 바람도 바다도 강도 시내도 흔적을 남긴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표현을 읽으며 자연의 글을 읽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고 싶다는 욕심을 품어 본다. 책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나지만,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도 말한다. 눈으로 보이는 글자를 쓰고 읽지 않아도 몸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삶에 온전히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글자라는 형식이 필요 없다. 나는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에 글자라는 수단에 의존하고 기대는 것뿐이다. 삶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글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 쓰는 기쁨
“최고로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형편없는 시를 짓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이다.(p116)”
작가는 아니지만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 머릿속에서 전쟁이 난 것처럼 혼란스러울 만큼 대작을 만나도 행복하지만 그런 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한 편의 내 글이 나를 더 만족시킨다. 내 글이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다. 대문호의 글보다 잘 썼다는 착각을 해서도 아니다. 내 글이라서다. 내 안에서 엉클어진 실 뭉텅이로 뒹굴던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완성된 문장이 되었다는 사실도 기쁘고, 내 안에 꽉 들어차 숨 쉬지 못하게 했던 생각의 조각들이 빠져나와 비로소 호흡할 수 있게 되었기에 기쁘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버리지 못하면 숨을 쉴 수가 없다. 글자들이 머릿속에 떠다닐 때면 어지러워진다. 비워야 나는 숨이 쉬어진다.
“언어는 다른 누구보다 시인이 가장 괴롭게 느끼는 결손이요 이승의 짐이다.(p117)”
어떤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 중에서 언어가 가장 초라하다고. 언어 이외의 도구가 없는 이에게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그 언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 수시로 왜곡되고 오해받고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을 때 가장 큰 결손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 언어로 세상을 만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전부이기에.
“예술에 반영되는 것은 결코 개인의 의지나 우연이 아닌, 불가피한 필연성이다.(p272)”
글이든 음악이든 모든 예술은 불가피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것이고 그릴 수 밖에 없어서 그린 그림이 우리를 감동시킨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헤세의 책이 그랬다. 그는 살기 위해 글을 썼고 그래서 그의 글은 언제나 진지했고 진지하지 않은 글읽기 자세에 대해 이 책에서 그는 그토록 엄격하게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헤세는 언제나 옳다. 나의 청소년기를 함께 한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기쁨이 드는 책이다. 책의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읽는 내내, 그리고 서평을 쓰기 전, 그리고 서평을 마치는 지금까지, 그 감정은 변함이 없다. 헤세라는 이름만으로 설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