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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경 Sep 05. 2021

책임감을 잊은 ‘을’ 수퍼 ‘갑’이 되다

책임의식 부재가 불러온 나비효과

일요일 새벽부터 눈을 떠 업무를 시작했다. 프리랜서가 그렇지 뭐. 하지만 뒤돌아서면 당이 떨어지는 서른 중반의 나이를 숨길 수가 없다. 커피를 연거푸 털어 넣어도 도무지 집중은 되지 않고 속은 쓰리다. 나이가 들수록 소화력은 떨어진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의 먹성은 소화불량을 이겨내고 '고탄고지'를 외치고 있다.


전날 칼로리 걱정을 잠시 미뤄두고 도넛을 꾸역꾸역 넘긴 탓에 위장에선 빨간불이 켜졌다. 아무도 모르지만 스스로의 양심상 샐러드 한 끼로 퉁쳐볼 심산이었다. 당초 쓰고 싶었던 주제를 미뤄놓고 주인의식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 일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필자는 모 베이커리 체인점에서 샐러드와 커피를 주문했다. 지난 두 달간 다이어트를 한다는 명목 하에 물리도록 샐러드만 선택했던 터라 메뉴를 고르고 주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먹을 것엔 진심이다. 라이더의 발걸음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이 마음은 먹보들만이 알 수 있는 마음 아닐까. 사랑스러운 종이백이 현관문 앞에 가지런히 놓이자, 두 손으로 티파니 목걸이를 들어 올리는 것 마냥 조심스럽게 운반하며 나름의 경건한 식전 의식을 거행했다. 이런 과정을 구구절절 표현할 필요는 없는데.. 어느새 주제를 잊고 먹보의 본성이 깨어난다.


'아! 망했다' 드레싱을 붓고 채소를 버무리던 중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선도가 생명인 샐러드의 상태는 누가 보아도 하루를 훌쩍 넘겨 보관되었음을 짐작케 했다. 심하게 갈변된 채소, 딱딱하고 냄새나는 치킨 커틀렛, 화려한 생일파티 뒤 너져분하게 널린 풍선 잔여물처럼 뿌려진 치즈가루를 본 순간 이성이 마비됨을 느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먹보는 먹을 것에 진심인 편이라.


최악이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배달앱 리뷰도 쓰지 않는데 직접 매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항의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샐러드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을 정도의 신선도라면 만족할 터였다.


전화 공포증을 날리는 상냥하고 가벼운 직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굳이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 제조일과 유통기한을 물었는데, 상대는 매우 당연하다는 듯 언제 만들어졌는지, 얼마나 보관된 상태인지도 몰랐다. 주말에는 인력이 없기 때문이라나. 의문이 밀려왔다.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포장한 종이백을 라이더에게 전달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대체 무엇을 원했던 걸까. 꺼림칙한 샐러드의 상태에 한입도 대지 못해 분노 게이지가 머리 꼭대기에서 부글부글 대고 있는데 도무지 결말이 나지 않는 상태에 봉착했다. 나는 환불을 원했나? 아니라면 그저 사과를 바랐던 건가? 엄청난 혼란 속에 빠진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1 이 직원은 재고 판매에 대한 일말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2 문제를 짚어줘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자신이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고, 4 자신의 손을 거친 제품에 대해 ‘모르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규정이라고 답했다면 더 이상의 설전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감정이라도 전달했다면 상대는 단지 실수였겠거니 너그럽게 넘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석연치 않게 끊긴 통화 이후 제대로 된 정보로 해명하려 시도했다면 본사에 항의가 접수될 일도, 매장이 점검받을 일도 없었을텐에 말이다.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직원에게 손님은 더이상 갑이 될 수 없다. 수퍼 갑과 을이 존재할 뿐이다.


경제성장 시절 ‘주인의식을 가져라'라는 말이 노동착취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표적인 갑의 레퍼토리였다. 이제는 비록 ‘꼰대어'로 전락해버린 신세이지만, 해석과 단어를 순화한다면 책임감, 책임의식 정도로 견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주인의식이 빠진 자리에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난감하기만 하다.


우리는 종종 '월급루팡'을 목도한다. 혹자는 '월급루팡'이라는 단어 자체도 불쾌하다고 말한다. 쉬운 직장생활이 어디 있겠냐고들 한다. 하지만 넓은 세상 속 존재하는 개미만큼 베짱이도 많다. 책임을 회피하며 연명하는 '을'은 수면 아래 존재한다.


프리랜서 일을 하며 여러 동료들을 만났다. 동료 A 씨의 경우 남의 작업물을 그대로 카피하면서도 운 좋게 번번이 빠져나갔다.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결과에 대한 조급함도 없었다. 반면 동료 B 씨는 누가 보지 않아도 요구된 결과물 이상을 해냈고, 시간 안에서 충분히 욕심을 내고 완벽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당황하는 쪽은 의외로 B 씨였다. 왜일까? A 씨는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결과물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일, 어떤 직책에 있어 과도하고 맹목적인 충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사회의 일원으로써 작은 일이라도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책임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을'이 상처 받지 않게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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