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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Apr 12. 2021

난 널 믿었던 만큼 내 친구도 믿었기에

열세 살 봄, 짝꿍으로 만난 해롱이. 처음 우리 둘 사이는 그저 그랬다. 친한 무리들은 4 분단 다섯째 줄 즈음에 한데 모여 앉게 되었는데 나만 1 분단 셋째 줄이었다.


, 나만  여기야?!”


새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놓고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면 친한 친구들이 몰려있는 교실 반대편으로 갔다가 다시 종이 울릴 때쯤에야 자리로 돌아왔다. 짝꿍이었던 해롱이가 서운해했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다.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저 해롱이가 점점  좋아졌다. 초반  아이를 서운하게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죄책감처럼 남아있다.


해롱이는 더 이상 일기 검사가 없는 6학년에도 매일 일기를 쓰는 아이였다. 부모님이 일기 검사를 하고 일기장 하단에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사춘기 초입이었던 우리들은 센 척, 어른인 척 그런 해롱이를 놀리곤 했다.


,  애야? 부모님 검사 맡게?”



@Ivan Aleksic / unsplash.com


해롱이는 그때도,  이후에도  번도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물어보니 아빠가 직접 수학의 정석으로 가르쳐주신다고 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멋졌다. 정석을 푸시는 부모님이라니! 겉으론 아무 말 안 했지만 어린 마음에 나도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롱이는 똑같은 문제집 두 권을 사 오더니 하나를 내게 건넸다. 하루 분량까지 정해주면서. 각자 풀어와서 서로 바꿔 채점하자고 했다.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집이 없었는데 해롱이 덕분에 생겼다. 문제집을 끝낸다는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도 이때 배웠다.


@Anthony Delanoix / unsplash.com


우리는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만났다. 해롱이는 학교에서 우등생들을 뽑아 방과 후 “특별반”을 운영하던 것을 패러디해 “특수반”을 만들었다. 선발 기준은 <아무나>였다.


“특수반”은 “특별반”이 하지 않는 시간대를 골라 불 꺼진 교실에 모여들었다. 평소엔 얼굴도 몰랐던 수위 아저씨들에게 순대까지 뇌물로 바쳐가며.


우리끼리 서로 가르쳐주면서 공부하기도 하고 가족 오락관에 나오는 게임을 하기도 했다. 이 친구들과 있으면 늘 웃느라 배가 찢어질 거 같았다.


해롱이는 과고를 갔고 난 그 옆 학교를 갔다. 그때부턴 주로 편지로 서로를 응원했다. 어느 날 해롱이가 말했다. 네 편지들 모두 모아서 언젠가 책으로 내주겠다고. 그러니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멀리 유학 가던 날, 쿨하게 밥 먹자마자 떠난 엄마와 달리 공항 게이트 들어갈 때까지 있어준 친구도 해롱이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 내 손에 꼭 쥐여준 세 개의 편지봉투.

 봉투 겉면엔 “아플 ”, “외로울 ”, “비행기 안에서라고 쓰여 있었다.


유학 생활 내내 부적처럼  지켜주던  통의 편지들. 돌아갈 때까지 나머지  통은 끝끝내 읽지 않았다. 보다  아프고 외로운 순간을 위해 남겨두고 싶었다.


@Sam Manns / unsplash.com


그런 우리도 싸운 적이 있다. 아니 싸웠다기보다 서운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터진 적이 한번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해롱이가 소개팅해 줬던 같은 학교, 같은 랩실의 남친. 그 녀석의 선배를 만나기 위해 혹은 학교 근처의 맛집을 찾아가느라 남친 학교 근처에서 몇 번 데이트하곤 했다. 문제는 그 학교는 해롱이 학교이기도 했다는 것.


어느 순간부터 같은 랩실의 선배들이 해롱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너랑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어떻게 학교까지 놀러 와서 너는  보고 남친만 보고 가냐?"


" 친구는  XX  좋대? 쟤가 어제 어디 갔었는지  친구는 알아?"


장난도 자꾸 듣다 보면 수긍하게 된다. 해롱이는 차마 내게  말은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지만 우리 사이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 못 챌 정도로 나도 둔감하지는 않았다.


어느  부모님이 여행 가신 해롱이네 집에서 우리 둘은 그간 참아왔던 이야기들을 터뜨리며 서로 붙잡고 밤새 엉엉 울었다.  때문에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그런 말을 들어왔다니 참을  없었고 잘못된 만남인  녀석과는 깔끔하게 헤어졌다.


그랬던 우리가 요즘엔 서로의 생일에만 톡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미국에서 싱글로 살고 있는 해롱이와 홍콩에서 아이 기르며 살고 있는 내가 함께 즐거워하며 나눌 수 있는 주제는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옛날 옛적 이야기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으론  누구보다 서로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는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요즘은 누굴 만나고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친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원한  짝지, 해롱이. 갑자기  보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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