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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Sep 29. 2021

이금희 아나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여름 이야기


H.O.T, 젝스키스, S.E.S 그리고 핑클.


1세대 아이돌이 혜성처럼 등장하던 90년대 후반, 나와 친구들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차가운 교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평소는 말할 것도 없고 설날과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도 2시까지는 학교로 돌아와 자습해야 했던 그때 그 시절.


그런 삶 가운데에서도 나름의 숨 쉴 구멍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야자 시간에 몰래 듣던 라디오, 친구가 녹음해서 선물로 준 늘어진 테이프 그리고…


가뭄 속 단비 같았던 주말의 음악 방송.


일요일 오후 5시 30분, 고요한 교실을 조용히 울리는

텔레비전 전원 파열음이 들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커다란 TV 화면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저녁 식사시간으로 주어진 잠깐의 틈새를 이용해 용감무쌍한 누군가가 교탁 옆에 위치한 교육용 텔레비전을 조작해 SBS를 트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볼륨 최대한 낮추고 소리 없는 비명 질러가며 브라운관 너머의 화려한 세계로 그렇게 빨려 들어가던 우리들.


그 화려한 세계는 곧 선망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인지. 적당히 품위 있으면서도 명예로운, 그렇다고 너무 유명해지지도 않으면서 TV 매일 얼굴을 비출  있는 직업으로 아나운서만큼 괜찮은 직업도 없었나 보다. 아나운서는 그렇게 많은 여학생들의 장래희망으로 급부상했다.


딱히 되고 싶은 게 없었던 나 역시도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기웃댔다. 발음 하나는 자신 있었다. 게다가 친구 삐삐 음성 사서함을 대신 녹음해 줄 정도로 목소리 좋다는 말도 몇 번 들으면서 한 번 해볼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 생겨났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시간 앞에 나가서 하는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뒤에 앉아 있던 Y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지만 때로는 언니처럼 느껴지던 Y가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억양으로 건네던 말,



우리 OO는
오디오는 확실한데
비디오가 참… 거시기 햐.



목소리는 좋은데 얼굴이 안 된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던 내 친구 Y. 선생님 몰래 둘이 킥킥대며 한참을 웃었다.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입에 발린 말 못 하는 Y가 목소리만큼은 인정해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Y는 여자들끼리 "니가 더 예뻐.", "아냐, 니가 더 예뻐." 식의 대화를 견디지 못하는, 다소 직설적이긴 했으나 츤데레 스타일의 정이 넘치던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


그렇게 웃고 넘긴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크게 휘몰아치던  Y의 뒷말.


난 생각보다 뒤끝 있는 사람이었다. Y의 말처럼 비디오에 자신 없었던 난, 이후에도 언론 고시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물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놀기 바빠 시험 준비할 여력도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아나운서 꿈과는 영영 멀어져 갔다.

절실하지도 않았기에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전임자였던 친구가 유학을 떠나면서 [KBS 사람을 찾습니다] 통역 일을 덜컥 맡았다. 생방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프랑스어권 해외 입양자들을 통역하는 일이었다.


‘아, 하필 인생 최고의 몸무게를 찍은 이때!’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도 잠시였다. 급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싶었으나 희한하게도 다이어트를 마음먹은 날엔 꼭 더 먹게 되는 아이러니라니. 결국 1킬로도 빼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송국을 향했다.



초여름 무더운 날씨에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여의도 KBS 별관. 분장팀이 따로 있을 줄 알았는데 10분 잠깐 출연하는 통역사의 헤어, 메이크업 봐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뭔 배짱이었는지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나중에 조금은 친해진 PD님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번들거리는 기름기 좀 잡아주라고 작가한테 대신 부탁해 주었다. 부끄러우면서도 고마웠다.


메인 MC는 김홍성, 위서현 아나운서 두 분이었다. 방송 시작 한참 전부터 스튜디오로 나와 박수 부대로 앉아 있던 어머님들의 딱딱하고 기계적인 분위기를 풀어 주던 김홍성 아나운서. 출연진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던 따뜻한 카리스마가 참 인상적이었다.


드디어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걱정과 달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사전 원고와 다르게 돌아가는 생방송 통역에 신경 쓰느라 떨릴 틈도 없었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무심코 바라본 정면. 카메라  커다란 화면 속에  사람이 보인다.


'둘은 아나운서인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얼핏 봐서는 이금희 아나운서 같기도 하다. 근데 이금희 아나운서가 여길 왜? 가만히 보니 옷 색깔이 나랑 같네. 짧은 순간 번쩍이는 깨달음. 나였다. 두 MC 옆에 서 있던 이금희 아나운서의 풍채를 닮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던 거다.


충격이었다. 살이 좀 찌긴 했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나조차 몰라볼 만큼. 방송 카메라가 1.5배 부어 보인다고 하지만 부어 보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방송에 출연했지만 다이어트엔 언제나 실패했다. 대신 정면 VCR 화면을 외면하는 방법을 택했다. 프로그램은 얼마 뒤 폐지되었다. 더 이상 방송 속 모습에 스트레스받을 일 없어졌으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하나.


잠깐 느낀 방송의 힘은 대단했다. TV 출연한다고 남편에게만 말했을 뿐인데 몇 년간 보지 못한 고모가 날 TV에서 봤다며 아빠한테 연락해 왔다. 심지어 한 두 번 밖에 본 적 없는 남편 친구도 방송 봤다며 문자를 보내왔다고 한다. 이 시간에도 TV 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평일 오전 시간대의 방송이었는데도.


짧았던 공중파 출연은 쓴 맛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방송국 어딘가의 아카이빙에 보관되어 있을 나의 영상은 생각만 해도 다시 보기 겁난다.


미련도 없다. 그때보다 몇 킬로는 더 나가는 몸뚱이를 굳이 방송 카메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의 현실을 나만은 모르길 바라고 있다. 마치 제 몸뚱이는 숨기지 못한 채 머리만 바위 속에 박고 있는 까투리처럼. @이백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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