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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Oct 20. 2021

오늘도 여전히 유치하고 부끄러운 제자리걸음 중

입사 3년 차 즈음,  한 선배가 물었다.


“남편 연봉이 어느 정도나 되면 회사 관두고 전업주부할 마음이 들 것 같아?”


어려운 취업 관문 간신히 뚫고 스스로 돈을 벌게 된 지 고작 3년째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직장을 그만둘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집요하게 물어보던 뺀질거리는 선배. 어떻게든 원하는 대답을 해줘야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신문에 나던 유명 인사의 연봉을 답했다. 그 정도라면 왜 나와서 이 고생하겠냐고, 마음 편히 집에서 아이나 키우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의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흘렀다. 한 회사를 거의 이십 년 가까이 다니던 남편의 연봉은 거짓말처럼 어느새 그 금액이 되어 있었다.


뜬구름 잡듯 무심코 말했던 액수였다. ‘그래도 그 정도면 돈 걱정은 안 하겠지’, ‘조금은 더 행복하겠지.’ 연봉이 오르면 삶에 대한 만족도 역시 따라 오를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꼭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 집 남편이 십을 벌면 다른 집 남편은 오십을 더 벌었다. 몇 달을 고민하다 큰마음 먹고 지른 백 원짜리 시계에 뿌듯해하고 있으면 누구는 천 원짜리 옷을 입고 나타났다. 행복한 마음이 한 달이 채 가지 않았다.


회사 다니면서 지쳤던 심신. 그래도 직장을 스스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젠 정말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에 남편 따라 홍콩에 왔다. 내심 좋았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렇게 주부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치열하게 살던 “내” 하루는 어디 가고 잠들기 전 기도는 늘 남편과 아이에 대한 바람들로 채워졌다. 가끔 전화해 “내” 일과를 묻는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는 사람들 역시 아이 친구 엄마들이 대부분.


어떤 아이는 홍콩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ESL을 끝냈다고 하고, 또 다른 친구는 다니는 학원만 네 개가 넘는다고 한다. 소문난 과외 선생님들을 소개해 주며 엄마가 아이 교육에 너무 무심한 것 아니냐며 질책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거기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좋은 곳으로 이직해 월세가 훨씬 비싼 남쪽으로 이사 간다고 부러워들 한다.


끊이지 않는 수다 속에서 과연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 남편과 아이 자랑을 해도 다른 집 남편과 아이 자랑을 들어도 늘 집에 돌아올 땐  찜찜한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남편과 아이가 내 얼굴을  대신했다. 더 별로였던 건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들이대고 있던 비교의 잣대.


“누구 남편은 그렇게 인물이 훤하대.”

“이번에 그 집 애는 어디 학교에  붙었다던데.”


예전의 내 시간은 제법 비쌌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나조차 내 시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무언가를 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아이 픽업 전까지, 남편 퇴근 전까지 그저 ‘때우는’시간이 되어 버렸다.


아이한테는 그렇게나 자주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면서 나는 그냥저냥 살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꿈은 젊은 사람들의 특권이지 내가 넘볼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택배로 열 권 정도 되는 책을 보내주며 말했다.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데 택배비나 책값이 뭐 대수겠냐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직도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 기대하는 누군가가 있다니! 나조차 포기한 마흔 살의 나를 여전히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니 설렌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시 십대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꿈을 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매일 꾸준히 쓴다면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싹이 돋아났다.


언젠가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괜찮은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꿈도 용기 내어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두고 이따금 혼자만 열어보고 싶었던 꿈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하다 먼 훗날 짠! 멋지게 이뤄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만 알고 있던 꿈을 나조차 잊었다. 내 하루 중 어디에도 그 꿈을 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자신도 없었다. 날고 기는 수많은 문장가들 앞에서 내 글이 설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게다가 부족한 나를 밀어 부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이십대의 포기는 아쉬운 법이지만 사십대의 포기는 미덕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이 더 고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재능보다 빛나는 건 꾸준함이라는 글이 자꾸 눈에 걸린다. 천재 중 천재인 뉴턴도 자기가 발견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인내였다고 한다.


박막례 할머니도 그랬다. 육십 살에 영어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 나이에 영어 배워서 어따 쓰냐'는 다른 사람들 말에 관뒀단다. 그러나 만약 그때 시작했다면 칠십 세 유튜버가 되어 미국 구글 본사에 갔을 때 몇 마디라도 하지 않았겠냐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 말 하나 쓸 데 없다고. 뭐든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희망고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든 열심히 하는 자세는 내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다. 하다 하다 해도  안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책이라도 내면 되겠지. 될 대로 되라, 못 먹어도 고다. @이백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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