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영상화, 단편영화 시리즈 2. 인터뷰
시 쓰는 박진철(74) 어르신께서는 실내에서도 꼭 모자를 썼다. 하얀 베레모와 체크무늬 남방은 눈가의 물결마저 '진짜 시인'의 훈장처럼 보이게 했다. 그 사실을 알려주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인은 아니지. 그냥 시를 좋아하는 거야.
시인은 굴곡있는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했으면 좋겠어.
그는 전북 전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상경하여 졸업 후 30년동안 쭉 금융계에 종사하였다. 삶이 정말 평탄했다고 말하며 지금껏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왔으니 노년의 끝마무리를 잘 하기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국 내가 하고싶은 것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빼면 무엇이 남겠어, 이 인터뷰도 그 마무리의 일부라고 생각해."
시는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쭉 써왔다. "젊었을 적 썼던 건 사실 시라고 하기도 싫어. 엉터리였지." 대학 입학 동기 중 하나가 죽었을 때, 추모시를 써서 학보에 낸 것이 그의 첫 작품이었다. 시로 활동을 하거나 작품성이 뛰어났던 것은 아니지만, 작시에 대한 동기는 그 때 생겼다. 하지만 그는 본격적으로 작시를 시작한 건 1년 전에 복지관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한 후로 친다며 웃었다. 고향에 대한 시집도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나눠줬었는데, 그 글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이 그래도 훨씬 나아진거야, 선생들이 잘 가르쳐주거든"
그의 휴대폰엔 시에 대한 메모들이 가득했다. 자식들과 손주들의 사진을 팍팍 넘겨가며 당신의 시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에 이해하기 어려운 시구들에 대한 설명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에 앉으면 한 두시간씩은 내리 시를 쓰게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컴퓨터를 하게 되는데, 컴퓨터를 본다는 게 참 피곤한 것 같아. 젊은 사람들은 대단해" 그렇게 복지관에 다니면서 혼자 집에서 쓰다 완성한 <풍물놀이>라는 작품이 KT&G복지재단 문학상에서 수상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덧붙였다.
"풍물놀이를 쓰는 데 얼마나 걸렸다고 해야 하나... 쓰기 시작한 건 올해이지만, 시상과 소재는 전부 스무 살도 되기 전의 것들이거든(웃음)" 그가 살던 동네에 있었던 풍물패는 정말 기막힌 하모니를 만들어냈었다고 한다. 그는 보통 언제 공연을 볼 수 있었냐는 질문에, 풍물의 개념이 지금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냥 마을에 집집마다 어느 집에는 꽹과리 잘 치는 놈, 어느 집에는 징 치는 놈들이 사는 거야. 그럼 동네 이장이 마을 한 바퀴 돌면서 "한 번 놀자" 하면 모여서 놀고 하는 거지. 풍물은 마을에 항상 있었어." 그런 풍물이 좋아서 직장을 다닐 때 사물놀이 동아리도 만든 그였지만, 고향의 것만큼 신명나진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풍물은 고향에서조차 더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고향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아직도 재개발로 없어진 마을을 생각하면 그리운 마음, 슬픈 마음이 든다고 한다.
"옛날에 토끼 잡던 산이 이제 시민공원이 되고, 거기서 행글라이딩도 하고...
그런 걸 보면 기분이 묘해. "
그는 부모님의 성묘가 아니면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래도 나이 들고 생각해보니 편하게, 행복하게 살아 온 것도 고향생각과 풍물이 힘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고향이 시골이 아닌 사람은 얼마나 정서적으로 메말라있을까, 생각할 때도 있어. 웃기지"
그는 본인 시의 주된 정서가 그리움과 후회인 이유 또한 고향에서 온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신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있지만, 고향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도 있다고 말하며 그는 고개를 떨궜다. 그는 본인이 쓰고 있는 모자를 누르며 자신이 왜 모자를 쓰는지 설명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멋있어 보이려고(웃음). 하나는 하늘에 죄를 많이 지어서 쓰고 다니는 거야. 부모님께 죄를 많이 지어서."
또 하나의 후회는 젊은 시절 하고 싶었던 것을 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그에겐 배움에 관한 후회가 가장 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못 갔었지. 유학도 못 갔어. 그땐 시골에 돈을 많이 벌어다 줘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것들을 포기했었지.” 그는 그냥 돈을 많이 주는 곳으로 진로를 결정했던 게 후회가 된다며, 요즘은 여러 군데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으니 꼭 젊은 사람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늙는다는 건 익어간다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것으로 생각해. 사람은 누구나 병에 걸리든 나이가 들든 죽기 마련인데, 멋지게 죽기 위해선 멋있게 사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멋있게 사려면 어떻게 해야겠나?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지." 그는 요즘 참 시간 잘 간다며 수요일에 친구들 한 번 만나면 일주일이 가고, 월요일에 운동 한 번 가면 일주일이 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보여주며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즉시현금 갱무시절', 본인의 좌우명이라 했다. "지금, 이 시절은 바뀌지 않아. 그러니 이 순간에 열심히 하고 현실을 즐겨야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는 당신에게 시란, 인생에서 시를 의미 있게 생각할 정도로 깨우치진 못했지만, 적어도 노년을 즐길 수 있는, 죽음을 아름답게 빛내는 하나의 방법이자 과정이라고 했다. "내가 뭐 시인이 될 것도 아니고, 시론을 설파할 정도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가 가는 데에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기는 하나의 수단인 거지." 마지막으로 그는 시집을 낼 거냐는 질문에 “내가 안 내면 후에 우리 애들이 내주겠지.”라고 하며 미소지었다.
나를 확실히 뒤집은 것 같아? 날 좀 잘 아는 계기가 되었나?
난 정말 평범한 사람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와 그의 우산은 비와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빗소리와 천둥소리는 북과 꽹과리의 그것들과 같았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값진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 주신
박진철 어르신께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