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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tober Oct 17. 2020

극명한 색의 대비처럼 그들은 과연 각기 다른 존재일까

영화 <케빈에 대하여> (1)




극명한 색의 대비


엠마의 모든 감정을 빨강 하나로 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빨강의 대표 채소인 토마토 축제로 시작한다. 토마토 축제를 한참 즐기던 그녀의 얼굴은 마냥 즐기고 있지만은 않다. 타인에게 온전히 몸을 맡기었다가, 이내 고통스러워한다. 빨간색은 더 진해져 가고, 토마토 진흙탕의 완성이다. 빨간 조명, 빨간 사과, 빨간 와인, 빨간 토마토케첩이 뿌려진 스크램블, 빨간 조명에 비친 엠마의 지치고 피곤한 얼굴.


엠마의 피곤한 얼굴 [출처 : 네이버 영화]


이렇게 서막이 열린다.
즐거웠던 순간이자 가장 방심했던 순간도 빨간 조명, 12시에서 12시 1분으로 향하던 시계도 빨간빛,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순간도 빨간빛, 이웃 사람을 피하고 싶었을 때도 빨간색 통조림이 배경, 누군가가 엠마의 집과 차를 빨간색 페인트로 낙서해놓은 것, 케빈과의 첫 공놀이 공색도 빨간색, 케빈이 엠마의 방에 빨간 물감으로 낙서한 것 까지. 엠마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색이자, 엠마가 가장 되돌리고 싶고, 지우고 싶은 순간들이 빨간색으로 표현된다.




빨간색과 대비되는 색으로는 주로 하얀색과 파란색이 쓰인다. 빨간 케첩을 뿌린 스크램블에서 나오는 하얀색 달걀 껍데기, 케빈이 주로 입은 옷 색도 하얀색과 파란색, 케빈의 방 인테리어도 파란색, 이웃 주민을 만난 마트의 인테리어도 파란색, 케빈의 파란 죄수복, 엠마가 집에 낙서 된 빨간 페인트를 지울 때 입은 빨간색 티에 묻은 파란색 페인트까지. 빨간색과 파란색, 빨간색과 하얀색 엠마와 케빈은 색으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파란 조명의 케빈 [출처 : 네이버 영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고 해 이 둘이 온전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감독은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결국 그들은 하나임을 표현한다. 엠마가 물속에 얼굴을 담근다. 이내 그것은 케빈이 된다. 바로 이 장면, 결국 그들은 하나임을, 가족임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표현한다.




아이도 아이인 게 처음이듯 엄마도 엄마가 처음일 뿐이다.
엠마와 케빈 [출처 : 네이버 영화]


엠마의 대사에 이런 게 있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너를 낳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뉴욕 도시에 있었을 거야.”


그녀는 잘나가는 여행 작가이자,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 꿈 많은 여자이다. 그런 사람이 ‘뜻밖의 임신’으로 많은 걸 포기하게 되었을 때 오는 우울감은 어떠했을까. 하루하루 비참하고, 우울했을 것이다. 이 두 단어만으로는 그녀가 느꼈던 것들이 온전히 표현되지 않을 것에 확신한다. ‘뜻밖의 임신’에 대한 원망과 하고 싶은 것에 대한 갈망으로 그녀는 하루하루 지쳐가고, 말라간다. 자신의 정신조차 평안하지 못한 이에게서 따뜻하고 풍요로운 ‘사랑’이란 감정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준비되지 않았는데 하고 싶고, 가고 싶고, 자신을 위해 할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을까. 희생을 당연히 여기고, 수긍하며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처음일 뿐인데 미리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마치 모든 게 준비된 사람처럼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엠마가 육아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 받고 있음을 공사 소리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순간에서야 편히 크게 숨을 들이쉬는 그녀의 모습. 그렇게 그녀에게 아이란 힘들기만 한 것이다. 어렵고, 벅찰 뿐이다. 남편 프랭클린은 육아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잠깐잠깐 틈나는 시간에 놀아주기만 하는 게 그가 하는 육아 전부다. 혼자 하는 육아는 그녀에게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다.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 떠오른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야.”


처음이라, 서툰 엄마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 표현이 아이에게 전혀 와 닿지 않았을 뿐이다. 엠마는 ‘모성을 상실한 엄마’가 아니다. 다만, 처음이었을 뿐이다. ‘서툰 엄마’였기에 서툰 안음이었으며, 서툰 사랑이었고, 서툰 관심을 준 것이다.조금 더 사랑받고 싶고, 안기고 싶고, 관심 받고 싶은 게 ‘아이’ 아닐까. 엠마도 서툰 엄마지만, 케빈 역시 ‘서툰 아들’이었다. 케빈도 아들이 처음이니까. 조금 더 사랑해주세요. 조금 더 안아주세요. 조금 더 관심 가져주세요. 라는 표현은 어렵기만 하다.




케빈은 자극적일 때 서야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엠마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럴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관심과 애증을 느낀다. 이렇게 그는 단지, 엄마에게서 좀 더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었던 것이고, 조금 더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가끔, 아주 가끔 용기 내 서로에게 미안함을 표하지만, 내일이 찾아오면 반복되는 나날이다. 서로에게 잔인해지고, 미안한 일을 만들 뿐이다. 케빈은 점점 더 위험하고, 무섭고, 잘못된 방법으로 끊임없이 엠마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한다. 그는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잔인하고 포악해진다.
그 끝은 비극이자, 파국이다. 엠마에게 똥 기저귀를 갈게 하며 묘한 승리의 표정을 짓고, 면회 온 엠마에게 단 한마디 하지 않으며, 거만한 표정만 짓는 이런 케빈이 결국 엄마의 사랑이 고픈 어린아이였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단 두 번 있다. 동생이 태어난 순간과 엠마와 프랭클린이 이혼을 하자는 말이 오갔을 때. 엄마가 고팠을 뿐인데, 자신을 이유로 엄마와 헤어져야 한다니. 이 순간 케빈이 가장 불쌍해 보였다. 엄마를 잃을 게 두려워 케빈은 그렇게 잔인한 선택을 하게 되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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