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적이야 최숙희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만남은 2012년 봄, 어느 날 이루어진다.
친구들과 새로 생긴 쇼핑몰을 갔다. 맛있는 것도 먹고, 그동안 쌓인 얘기도 나누며 룰루랄라 신이 났다. ‘주부로서’ 나온 김에 장도 보겠다며, 쇼핑몰의 마지막 코스이자 큰 재미인 지하 마트를 향했다. 식품 코너는 어떨까 기대하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갑자기 똑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아랫배가 아팠다. ‘이건 무슨 일이 생긴 거구나’ 싶어 산부인과로 갔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산부인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증의 원인은 ‘새 생명’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아기집도 생기지 않았으니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 내가 왔어요!” 하며 초음파로도 보이기 전부터 아주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햇살이 유독 따뜻하던 어느 겨울날 아이는 세상으로 나왔다.
온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넘치던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며 기동성까지 얻자 제시간에 낮잠 재우기가 가장 어려워졌다. 코~자자 하고 누우면 빙글 돌아 기어서 돌아다니고 한참을 자장가를 부르며 토닥토닥해주어 이제 좀 잠이 드는가 싶으면 또 팔짝 뛰어 뒤집어서 기어가는 아기를 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잠자기 싫어하는 아기에게 ‘널 재우려는 것이 아니야. 우린 그냥 이 그림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나 같이 보는 것뿐이야. 너도 궁금하지? 그러면 어서 이리 엄마 옆으로 와. 우리 편안하게 누워서 이 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라는 분위기를 조성한다(엄마에게 연기력은 육아 필수템이다). 책에 대한 호기심에 아기가 스스로 누웠다면 반은 성공한 셈이다. 이제 아기의 온 관심을 책에 집중시켜 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게만 만들면 아기는 저도 모르게 달콤한 낮잠에 빠질 것이다. 이때 중요한 건 글이 긴 책이어야 한다. 순식간에 다 읽어버리면 다음 책으로 바꾸는 사이에 아기는 또 기어가 버릴 테니까. 그림책 [너는 기적이야]를 아기와 읽으려고 가져왔다. ‘이제 곧 아기는 잘 것이고 나는 드디어 자유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첫 장을 읽자마자 아까의 설렘은 사라지고 코끝이 찡해지고 책을 읽는 목소리가 떨린다. 그림책 속의 아기가 첫 이가 나는 부분까지 읽으면, 못 참고 눈물이 흐른다. 그런 엄마와 상관없이 아이의 주의력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고 책을 뒤로 휙휙 넘기며 왔다 갔다 하다 부욱 찢어놓았다. ‘네가 몹시 아프던 날…’이 나오는 대목에선 나는 오열을 하는데 아이는 이미 기어서 저쪽으로…. 그래, 언젠가 너도 학교에 가게 된다면 ‘네가 처음 학교에 가던 날…’이 나오는 페이지까지도 함께 읽을 수 있겠지 했다. 겨우 아기를 재우고 아기가 자는 동안 늘 그렇듯 그날도 찢어진 책들을 정성껏 수선한다. 찢어진 책을 붙이다 듬성듬성 들어오는 글자들에 나는 또 울었다.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바꿀 만큼 강한 만남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작은 사람인 ‘아이’가 나를 바꿨다. 초저녁잠이 많아 8시 언저리에 하던 장안의 화제 그 재밌는 시트콤들도 못 보던 나를, 밤 12시 가 넘어서까지도 눈을 찌르며 버틸 수 있게 바꿨고,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정갈하게 차려 먹는 걸 좋아하는 나를 국에 밥만 말아 후루룩 먹게 만들었고, 나의 세상에만 관심 있던 나를 밖의 세상에도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내 아이와의 만남은 기적이다. 나를 바꾸면서, 나를 다 내주면서까지 만나고 싶게 만드는 기적, 그 기적이 바로 나의 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