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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용 Jan 27. 2024

엄마의 비둘기

그 녀석의 이름은 앨리스라고 했다.  

초등학교 삼 학년 무렵이었다. 우리 집에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시험을 잘 보면 강아지를 키우게 해 준다는 엄마아빠 말에 성적표가 나오기도 전 설레발을 쳐서 새 식구가 된 시츄 두 마리 오공이와 구슬이(굉장히 프렌들리 한 이름인데 다섯 개의 공허함과 아홉 개의 슬기로움이라는 뜻이다. 작명은 엄마 작품).

너무나 착하고 명랑하던 나의 첫 강아지들이었다.

엄마는 오공이를 특히 예뻐해서 숟가락으로 밥을 먹였다. 초3 눈에도 약간의(!) 편애를 하는 게 보였는데, 엄마에게 그때 얘기를 하면 버럭~한다. (찔리는 게 분명하다. ㅎㅎ)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엄마가 데려온(주워온) 하얀 고양이 (1대) 미요, 귀가 심하게 컸던 흰 토끼, 깜희와 여전히 아빠는 산에서 주워온 줄 아는 고양이 (2대) 미요, 미요의 딸내미로 동안 미모를 뽐내는 모모, 비둘기 앨리스 군, 냥줍한 미루나무(뜻 미상) & 어비(다리가 불편한 아이라 up하라는 뜻이란다.)까지. 우리 집을 스쳐갔거나, 눌러앉은 아이들이 무려 여덟이다. (어쩌면 빠진 애가 있을 지도...)  


지금 부모님 집을 지키는 동물들은 고양이 셋에 비둘기 하나. 그 숫자는 나의 독립(=결혼)과 동시에 사람의 수를 넘어섰다. 엄마는 19살, 21살 고양이를 위해 24시간 전기요를 켜둔다. 아빠는 침대 한켠을 차지한 할냥이 녀석 때문에 잠을 설친다 투덜댄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아빠는 웃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람이 동물의 집에 얹혀사는 게 분명하다.


비둘기 앨리스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이름은 아주 어여쁘지만 사내(추정)다.  대부분 그랬듯 이 녀석도 엄마가 비줍(비둘기 줍기)으로 데려왔다.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성질머리가 대단하다. 특히 나를 싫어해서 내가 입만 열면 구루루루루~ 하는 특유의 비둘기 소리를 낸다. (아무래도 빨리 너네 집 가라는 것 같다.)


이 녀석이 지금까지 딱 두 번 집을 나간 적이 있다. 한 번은 일주일 만에 아주 날씬해져서(=수척) 돌아왔고, 그다음엔 반나절만에 귀환했다.  그 이후론 창문을 열어줘도 절대 안 나간다. 비둘기의 진화다.  우리는 그 이후 '밖에 나가면 새고생'이라는 말을 종종 했는데, 사실 앨리스가 집을 나간 새 가장 수척해졌던 건 엄마였다.


처음엔 고양이가 비둘기를 사냥(!)하면 어쩌지 걱정이 많았는데, 가끔 쪼로록 앉아있거나, 줄 서서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무튼 앨리스가 서열 1위다. 알 수 없는 동물의 세계란.)

비둘기가 이렇게 오래 사는 줄 몰랐는데 벌써 사춘기 중3 나이가 되었다. 밥에 대한 기호가 확실해서 맘에 안 드는 걸 주면 신경질을 몹시 내고 부시맨 브레드 같은 걸 한 덩이 넣어주면 며칠 동안 신나게 먹고 갖고 논다.  그새 괄약근을 만들어 달기라도 했는지, 새장을 나오면 참았던 변을 한 번에 보는 놀라운 지경에 이르렀다.  


예쁜 비둘기 앨리스가 집에 온 이후, 길거리 비둘기를 보면 여러 가지 마음이 든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부디 되도록 오래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과, 흰 비둘기를 보면 잡아서 집에 데려가고 싶다(앨리스 신부)는 마음 두 가지다.      

 

솜씨 좋은 엄마한테 비둘기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이 짧은 단상으로 갈피 잃은 글을 갈음한다.




2009 여름 앨리스,  Serendipity  


집에 와 밤늦게 놀다 돌아가는 친구를 배웅하고 깜깜한 길을 되짚어 올라올 때 바닥에 희끗하고 동그란 모습을 보고 살며시 들어 올렸더니 손바닥에 폭 싸이는 아기새였다.

머루알 눈동자, 심장 뛰는 임팩트가 느껴진 건 착오이거나 기억의 에러일 수도 있으나 이 만남은 나의 좋아하는 어휘 serendipity, ‘뜻밖의 행운‘에 매우 가깝다.

아무렇지 않게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집에 함께 돌아와

사뭇 어울리는 앨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날갯짓 포르르 날아오르다 떨어지기를 수없이, 한자 ‘習(익힐 습)’의 의미처럼 수백 번 비상하는 동안 날개는 튼실 자라 아름다운 어른이 되었다.          

다음 해 첫 봄 오월 마당에서 앨리스는 처음 눈부시게 날아올라 하늘 다섯 바퀴를 돌아 사라져 버렸으나 칠일 후 새벽,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귀가했다.

이후 간결하고도 날렵해진 그 모습 그대로 십오 년이 흘러갔으며 그의 나이 십육 세가 되었다.       

21세 누나 고양이 미요, 19세 누나 고양이 모모, 8세 여동생 고양이 미루나무, 2세 여동생 고양이 어비와 잘 지낸다.




청춘의 아이콘. 좌측부터 앨리스(16세)와 모모(19세)와 미요(21세).


최애 장난감과 함께 늠름하게 선 앨리스 군.



모과 먹방 중인 앨리스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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