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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용 Dec 10. 2020

사장님, 약속이랑 다르잖아요

꿈에 그리던 오두막집,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안 될 거 같대요


저기요 오두막 사장님, 보고 계신가요?  


이번 크리스마스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갑자기 날아든 소식. 양평 오두막집 제작 일정이 늦어진단다. 오두막은 현장에서 바로 짓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져 컨테이너 운반차에 실려온다. 그런데 업체 물량이 밀려서 2월 말에나 받을 수 있단다. 마무리 공사하고 입주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3월 초다.   


'그런데, 저기요. 우리는 여름에 계약했는데요. 그게 왜 밀리죠. 그리고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시는 거죠?'  


매트리스, 이불부터 조명, 그릇 같은 자잘한 세간살이까지. 작은 방 한 칸은 다람쥐처럼 하나하나 사모은 물건으로 빼곡하다. '세 달은 이렇게 쌓아놓고 살아야 되겠네' 좀 기운이 빠져버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나보다 더한 것 같다. 입이 댓발 나왔다.


손바닥 만한 땅에서 꾸는 꿈  


우선 몇 주 전 대형마트에 가서 산 튤립 구근이 걱정이었다. 꿈만큼 손이 큰 부부가 산 구근은 칠십 다섯 개나 됐다.  '땅이 얼기 전에 심어야 한다는데 이 가엾은 아이들을 어쩌나' 전화로 물어보니 다행히 꽃은 미리 심어도 된단다. 토요일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전날 저녁 후배를 만나 감자탕을 먹는데 내일 튤립을 심으러 간다니 자기도 따라간단다. 귀엽고 쪼그맣지만 힘센 친구였다. '그래, 일꾼은 많을수록 좋지~' (씨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쬐그만 호미랑 삽을 챙겼다. 이거면 될까 싶었지만 그거밖에 없었다. 초겨울이라 날이 제법 쌀쌀했다. 열심히 껴입고 집을 나섰다.  


북한강. 저 멀리 수상스키 타는 사람이 보인다. 유세윤 씨는 아니겠지?


집에서 한 시간 반쯤 달려 도착한 양평. 일하다 배고프면 화나니까, 든든하게 밥부터 챙기기로 했다. 코로나 여파인지 가려던 식당은 휴업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 안고 근처 식당에서 시래기밥과 고등어를 먹었다. 비쌌지만 맛이 좋았다. 동생은 탄맛이 살짝 올라오던 누룽지 숭늉을 맘에 들어했다.  


일 시키려고 데려온 동생이 밥도 샀다. 밥 사 주는 사람, 좋은 사람...


배 두드리며 도착한 현장. 손바닥만 한 우리 삽과 호미를 보고 현장 사장님(오두막 사장님이랑 다른 분임)이 웃으시며 연장(네기)을 빌려주셨다. 역시 작업은 도구빨이다. 쭈그리지 않고 서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포크레인 오기 전, 하찮은 호미로 끄적이던 우리들  


오분쯤 낑낑거렸을까. 돌이 너무 많았다. 다시 사장님의 등장. 옆에서 일하던 포크레인이 소환되었다. 몇 초 만에 딱딱하게 굳었던 땅이 뒤집혔다. 와, 멋있다. 서울촌놈들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우리를 도와준 영웅 포크레인 + 기사님  

땅은 말랑해졌지만 크고 작은 돌을 골라내는 게 일이었다. 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돌밭이었다. 어느 정도 땅을 고른 후 줄을 맞추어 땅을 팠다. 그리고 한 명은 구근 껍질을 벗기고, 한 명은 10센티 간격으로 구근을 품을 구멍을 만들었다. 그러면 마지막 한 명이 그 구멍에 구근을 반듯하게 심었다. 완벽한(?) 환상의(!) 분업이었다.


'너무 힘들었으므로 중간 과정 사진은 없다.'


칠십 다섯 개의 구근 위에 다시 고운 흙을 덮고 고루고루 물을 뿌렸다. 여기저기서 시든 낙엽과 풀더미를 끌어와 이불처럼 덮었다. 파낸 돌로 꽃밭의 경계를 표시하면 끝이었다. 허리를 펴자 두 시간이 금세 지나 있었다. 동생 얼굴은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미안... 주말 동안 고기 파티하자) 그러게, 셋이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저 네모난 자리가 우리가 튤립을 심은 곳. 좁아 보이지만 매우 광활하다.


시간은 흐르고, 봄은 오겠지


튤립의 가능성을 품은 네모난 정원을 보니 뭔가 뿌듯했다. 마음을 다해 심었지만 어떤 색의 튤립이 얼마나 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천 원짜리 복권을 사는 마음이 이런 걸까. 토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설레었다. 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래,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아도 봄은 올 것이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 그곳에서 맞는 봄은 더욱 기쁘겠지. 게다가 이번 겨울을 즐겁게 보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겨우내 땅 속에 웅크리다 알록달록 피어날 튤립과, 함께 올 새 봄을, 그리고 우리들의 새 집을 기다린다.  


세 가지 종류의 튤립을 심었다. 봄이면 이렇게 예쁜 꽃이 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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