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측하기도 하지. 상자에 내용물을 집어넣고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문 앞에 놓여 있으니 당연히 우리 집 물건이 분명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물건을 구입했을까. 주문자가 가족 중 누구라고 믿고 싶지 않다. 혹시나 싶어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동(棟)은 같지만 호수가 다르다. 몇 해 전부터 입주자들이 수시로 바뀌더니 지금은 모르는 얼굴이 태반이다. 한 집 한 집 아는 얼굴을 연결시켜 보지만 몇 층 오르지 못해 맥이 끊기고 만다. 갖은 상상을 하며 여성생식기 용품이 든 상자를 봉해 주소지에 슬며시 갖다 놓았다.
그날 이후 추적이 시작되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버튼에 들어오는 불빛을 따라 곁눈질로 사람들을 살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런 이상한 물건을 주문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도 그 층을 누르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에서 포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날, 평소 눈인사만 하고 지내는 내 또래 여자가 승강기에 올라탔다. 두 딸과 함께였는데 내 몸을 비껴 손을 뻗더니 버튼을 눌렀다. 어라, 내가 찾던 그 층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상자를 놓고 온 집 주인이 맞다. 여자의 남편은 현관에서 마주치면 깍듯이 인사도 잘하고 얼굴에 항상 미소를 짓는 사람이다. 세상 점잖아 보이던 그가 설마?
오래전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쳐간다. 평온한 마을에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다. 충격으로 말을 잃은 여자 대신 마을 사람들이 범인 색출에 나선다. 마을 안에 그럴 사람이 없다고 믿기에 떠돌이 악사, 잡화를 팔러 다니는 상인, 품삯을 받고 일하는 품팔이꾼이 물망에 오른다. 그러나 범인은 바로 이웃에 사는 남자로 밝혀진다. 그는 자상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사람들의 놀란 눈빛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성에 눈뜨던 사춘기시절에도 그랬다. 친구 집에서였다.
친구는 엄마와 단둘이 살았다. 장사를 하는 엄마가 부재중인 그 애와 엄마와 떨어져 살고 있는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지냈다. 가끔 그 애 엄마가 집을 비우는 날이 있었다. 사감선생 같은 오빠는 밖엣잠은 절대 안된다고 하였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어른들 간섭에서 벗어난 열여섯의 밤은 온통 우리만의 것이었다. 잠들기 아까워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뜨고 있는데 슬며시 방을 나가던 그 애가 손을 뒤로 감춘 채 가다왔다.
“나, 우리 엄마 방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라며 작은 책자를 내밀었다.
표지에 전라의 여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모로 누워 있다. 여자는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나로서는 혼이 나갈 지경이다. 금기의 대상인 성을 이렇게 민낯으로 드러내다니. 침을 꼴깍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아도 심장이 요동친다.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솟구치는 호기심에 꼼짝없이 눌려 버렸다.
성교육이라고는 가정시간 신체변화에 대해 사진을 보며 들은 것이 전부다. 특정부위가 유난히 눈에 들어와 칠판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생리가 시작되면 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징조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하굣길 버스에서 내 다리에 손을 얹으며 음흉하게 웃던 아저씨에게서 재빨리 도망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생리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남녀가 얽혀 있는 장면을 마지막장까지 넘겼다. 사랑이란 색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인가. 좋아하는 국어선생님까지도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성(姓),성(城),성(聖)… 같은 발음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모두 성(性)으로만 읽혀졌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어른들에 대한 배신감에 시달렸다. 잡지에서 본 외설적인 성은 리비도를 억압하는 요인이 되어 마음의 성벽을 단단히 쌓게 만들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열정과 욕망과 행동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힘을 성적 본능이라고 보았다. 도덕이 아무리 발달해도 억누를 수는 없는 것이 성이라는데 남편과 사별한 친구 엄마는 그렇게라도 본능을 다스리고 싶었을까. 성인용품을 주문한 남자는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에너지를 분출할 색다른 방법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누구든 심연의 터널 끝에 검은 문 하나쯤 숨겨져 있을 터. 그 문 안에 어떤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