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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오늘은 Dec 31. 2020

유서(遺書)

마지막 날에는 죽음을

2020.12.31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 시작을 되돌이키기에는 너무나 까마득한 나의 친우들, 가족,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들에게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나의 삶을 크고 작은 웃음들로 채워주어서

때로는 슬픔으로, 찾아오는 행복을 값지게 느끼게 해 주어서

넘치는 다채로움 속에 살아가게 해 주어서

힘든 순간 곁을 지켜주어서

른 이보다 빨리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해 주어서

나의 유년기에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않도록 해주어서

태어나게 해 주어서

작은 종이에 다 담지 못할 많은 이유의 감사가 그대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삶에 가지는 미련이 있다면,

' 많은 것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보다도

나에게 과분하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와 같은 아쉬움으로 혹여 눈물 흘리는 이가 있다면,

기분 좋기야 하겠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나를 떠올린다면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기억되기를.


나의 삶이 끝나는 이 순간까지도 혹시나 그대와의 응어리를 다 풀어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잘못일 테니 자책하지 말기를.

나의 고집과 미숙함으로 당신을 힘들게 했다면 이제는 나를 용서해주기를.

너무나 과분한 사랑에 미처 보답하지 못하고 떠나는 못난 딸을 용서해주기를.

엄마, 우리 참 많이 힘들었는데

참 많이 사랑하고 미워했는데 이제는 더한 아픔이 없기를.


할머니, 우리 할머니.

코 앞에 살면서도 자주 찾아가지 않아서

전화를 자주 받지 않아서

그대를 자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는 내가 기다릴 테니, 더는 기다리지 말길.




사랑해.







 내게 유서 쓰기는 새해가 오기 전에 하는 신성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삶의 숨통을 한 번 끊는 것이다. 새해가 되는 내일이 나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깨끗이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좋은 도움닫기가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새해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죽음을 코 앞에 가져가 보기를 권한다.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이니 그 무엇보다도 공평하고 친숙한 것이다. 두려워하지 고 그에게 인사를 건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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