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를 알게 된 건 넷플릭스 덕분이다. 무슨 기준인지 몰라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줄기차게 추천했기 때문이다. 전혀 내 취향일 것 같지 않은 병맛 이미지의 프리뷰가 오토플레이 될 때마다 짜증이 났다. 그래도 추천 자체를 막기보다는 얼른 보고 치워버리자 쪽으로 기울 정도의 호기심과 호감은 있었다.
안은영의, 아니 정세랑의 기묘한 세계에 사로잡히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대사도, 이미지도, 음악도, 연출도,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총합도 절묘하게 내 코드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내 코드인지 몰랐던 내 코드였다.
드라마를 끝내고 불타는 호기심에 당장 책을 구해 읽었는데 드라마와 책 중 어느 편이 더 좋은지 끝내 고를 수 없었다. 한 작품이 장르를 바꾸는 일종의 ‘번역’을 거쳐서도 그 매력을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창작자가 기존 장르와 새 장르 양쪽 문법에 능숙하면서도 새로 주어진 가능성과 자유를 통해 기존 작품의 어떤 본질 같은 것 - 무엇보다도 창작자의 해석이 들어가는 부분이겠지만 - 을 성공적으로 옮겨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옮겨 놓는 것은 기존 작품의 정수여야지 작품 자체여서는 안된다. 그런 노력과 상상력없이 장르 간의 번역만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읽고 또 읽게 되는 해리 포터 책과 달리 한 번 봤으니 됐다 싶은 해리 포터 영화처럼.
<보건교사 안은영>이후 읽은 두 번째 정세랑 책은 <시선으로부터> 였다. 이 책은 그저 근사하다. 이북으로 보며 엷은 풀색으로 하일라이트를 하는데 어떤 페이지는 풀색 페이지에 흰색 하일라이트가 듬성듬성 있을 정도다. <시선으로부터>가 만일 손에 들 수 있는 오브제였다면 분명 앞, 뒤,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며 좋아했을테다. 손에 들고 빛에 비추어 보다 그 무게감과 질감마저 흡족해 하며 가끔 냄새도 맡았을 테지.
딱히 주인공이 없고 ‘시선’이란 인물로부터 ‘뻗어나온’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시선으로부터 출발한 많은 캐릭터들이 균형잡히게 다루어지는데 그들 모두는 조금씩 그리고 많이 시선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출발점은 시선이고, 그들은 그녀로부터 ‘뻗어나온’ 사람들이다. 그게 좋았다. 정정. 그것도 좋았다. 폐쇠적이거나 배척하지 않고 다름을 포용해서 확장하는 개념의 가족.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데 뿌리의 한 조각이 자신들 속에 있다고 믿는 것. 그래서 '그러니 나도 잘 살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나도/쟤도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야'라고 믿는 것.
서론이 길었는데, <시선으로부터> 중 한 캐릭터는 서핑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실행하고 극복하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서핑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부채감 같은 것은 있었다. 뮌헨의 영국정원에는 Eisbach라는 인공천이 있고, 그 한쪽에는 높은 파도를 만들어내는 격류가 흐른다. 그 파도에서 서핑을 하는 게르만족들의 역동적인 몸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나도 관찰자가 아니라 물에 뛰어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어제 아몰랑지금아니면언제 하며 처음 파도를 탔다. 이전까지는 ‘파도를 타다’가 수사적인 표현인 줄만 알았다. 서핑이란 것이 자동차나 말을 타듯이 실제로 파도 위에 올라 타 그 힘에 몸을 맡기는 행위인지 몰랐다.
파도를 타는 일 자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약간의 유연성과 순발력, 균형감각 그리고 많은 근력 혹은 체력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얕은 바다에 잔 파도였지만 마지막 시도에는 해변까지 자세를 유지한 채 나아 갈 수 있었고 기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강사도 엄지를 치켜 올리며 웃고 있었다. 성취감도 좋았지만 그못지않게 찬 바다 속으로 온몸이 처박히는 충격이 상쾌했다.
강사가 적절한 파도를 골라 보드를 밀어 가속을 붙여 주고 일어설 타이밍을 알려주는 레슨과 달리 자유서핑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무엇보다도 올라 탈 파도와 그냥 보낼 파도가 전혀 구분되지 않았고, 적절한 파도였다해도 올라 탈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체력이 된다면 아무 파도나 무턱대고 시도해 볼텐데 이미 뜨거운 햇볓에 달궈진 텐트 속에서 마스크를 쓴 채 웻수트에 몸을 꾸겨 넣는데 체력의 반을 쓰고, 보드를 바다까지 끌고 가는데 (들고 가는데 아님) 남은 체력의 반을 쓴 터였다.
더 시도하단 다칠 것 같아 결국 포기하고 뭍에 올라왔다. 사장님께 보드를 건네며 이같은 어려움을 토로하자 “아, 그건 어쩔 수 없어요. 파도는 무조건 많이 타봐야 알 수 있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여기서도 마일리지 이야기인가.
어느 겨울, 스키장까지 얻어 탄 트럭을 운전하던 스키장비 렌탈 가게 아저씨가 나른할 정도로 무덤덤하게 말씀하셨다. 실력은 마일리지가 붙으면 는다고. 당연한 이야기인데 당연히 되는 일은 또 아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겠지. 무조건 많이 써보면 그래도 좀 알겠지. 숙소에 들어와 소금기를 닦아 내며 찬찬히 살펴 보니 언제 어디에 부딪혔는지 모르게 여기저기 멍과 생채기가 나 있었다. 개운했다. 어쨌든, 최소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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