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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나 노 Aug 15. 2024

마음 훈련 5-아빠에게 아빠의 사망신고를 말했습니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아빠! 나 아빠 사망신고 해버렸는데? 아빠가 돈 쓰려면 아빠꺼 카드는 못 써, 현금만 써야 돼! “


번쩍, 눈이 떠졌다.

참나 무슨 이런 꿈을 꾼담.

꿈에서 본 아빠의 모습은 다행히도 아프기 전의 모습으로 건강했다.

아빠가 천국으로 이사를 간 지 네 달이 막 지났다.

벌써 네 달이 되었구나 싶다가도 아직 네 달밖에 안 됐구나 싶기도 하다.


꿈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아빠에게 아빠를 사망신고 했다고 말하는 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처음 아빠에게 사망신고를 말했던 꿈은

아빠랑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으로 기억한다.


“딸~! 아빠가 집을 좀 가야겠는데~”

“아빠! 나 아빠 사망신고하고 아빠 집 정리 다 했는데?”

“뭔 사망신고를 해~!!”


살아있는 사람을 왜 사망신고 하냐는 아빠의 헛웃음을 끝으로 잠이 깼었다.

이 꿈을 꿀 즈음엔 아빠가 혼자 살던 집을 정리하면서 아려오던 마음 한켠이 꿈에 반영된 듯했다.

그러니깐 나는 꿈에서조차도 아빠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번 꿈도 그랬다.

슬프게도 꿈은 꿈이라, 엄마와 아빠가 한 장소에 있는 그 상황부터가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으니까.

그러니 엄마와 아빠가 같은 장소에 있다는 것부터 어쩌면 ‘이건 꿈이야.’라고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꿈에서 아빠와 나는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두고 귀여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 나는 아마도 내 곁을 떠난 아빠와 강아지 둘 다를 그리워하고 있구나!)

아빠가 어떤 일로 돈을 써야 한다고 했는데 순간 아빠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는 내 무의식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를 사망신고 해버렸는데, 아빠가 왜 여기에 있지? 아빠가 밖을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잠깐만, 돈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아빠 명의 카드는 못 쓰잖아? 아! 그러면 현금을 쓰라고 하면 되겠다.


그렇게 나는 아빠에게 아빠의 사망신고를 했다고 말한 것이다.

도로로롱- 울린 기상 알람 때문에 이번에는 아빠의 반응을 못 보고 꿈에서 깨버렸다.


꿈을 계속 꾸었더라면 아빠는 내게 뭐라 말했을까,

아마도 이전의 꿈처럼 “살아있는데 뭔 사망신고여? 돈 줘!”라고 하지 않았을까.


어제 유독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가 떠나기 이틀 전, 요양병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 아빠를 만나러 갈걸.

평생 아빠를 미워했다는 이유로, ktx값 88,000원이 비싸다는 이유로, 내 체력과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이유로 나는 아빠를 한 번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뭐였을까.

‘고마워, 사랑해.’ 였을 테다.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미안해.’인데 말야.

아빠는 늘 나를 최선을 다해 키웠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이 싫었다. 그건 최선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난 항상 아빠를 미워했지만 그래도 아빠는 항상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음, 아빠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던 것 같다.


아빠는 마지막 가는 길이 고달프고 애달팠다.

재발한 간암으로 인해 항암치료도 어려운, 말 그대로 시한부 인생이었다.

아빠의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가정폭력으로 엄마는 떠났고, 둘째 딸은 17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남아있는 큰 딸은 매정한 듯 매정하지 않은 듯 가끔씩 전화로 안부만 물었다.


우리 가정이 깨어진 건 모두 아빠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술에 취하는 날이면 늘 엄마를 때렸다.

나는 무조건, 당연히 엄마 편이었다.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동생을 간병하느라 고생만 하던 엄마는 죄가 없었다.

두 분이 이혼을 하기 전 아빠가 내게 보여준 모습의 대부분은 도박을 하고 돌아와선 돈을 내놓으라고 엄마를 마구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욕을 하고 집 안의 물건을 부수고, 엄마를 때리고.

우리 집이 늘 가난하고 내가 늘 불행한 건 모두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어째서인지 나만큼은 한 번도 때리지 않았는데

(한 번은 나를 때리려던 걸 엄마가 대신 맞았다.)

아마 그게 아빠 나름의 ‘최선’이자 나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빨리 사라지길 바랐다.


2008년, 내가 고3이던 시절에 아빠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마음이 놀라 눈물이 나기는 했지만, 아빠만 없으면 엄마랑 나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편으론 드디어 지옥에서 해방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신은 가혹하게도 나와 엄마에게 자유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아빠는 수술을 받고, 그로부터 15년을 더 살았으니깐.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게 되었을 때도 아빠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너무 싫었다.

서두가 어찌됐든 전화의 마지막 즈음엔 결국 돈을 달라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아빠의 ATM기가 아니야.’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수백 번을 외쳐도, 계속되는 독촉과 착한 딸 콤플렉스 같은 것 때문에 돈을 보내주게 되었었다. 돈을 보내주지 않으니 어떤 날엔 목을 매는 쇼를 벌였으니깐.

가스라이팅, 아빠가 딸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24년 4월 11일. 아빠가 세상을 떠나면서 엄마와 나는 늘 시달렸던 ‘두려움’에서 드디어 해방이 됐다.

그런데 참 희한하지.

두려움과 미움의 자리에 그리움 같은 것이 자라났다.

시멘트 길에 피어난 꽃 한 송이처럼.

피어날 자리가 아닌데 잘못 피어난 것 같다가도,

그리움에 미안함이 더해지는 건 남아있는 자의 몫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미워하는 마음만 있었더라면 이렇게 혼란스럽진 않았을 텐데.

애증이 함께 있는 마음밭은 무성한 가시밭길 사이로 예쁜 들꽃 몇 송이가 듬성듬성 피어있는 것만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게 한평생을 미워했어도 아빠는 어쩔 수 없는 아빠인가 보다.


그래도 아빠!

꿈에서 살아있는 모습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줘서 고마워. 내가 바랐던 화목한 가족의 모습으로 아빠를 만나서 잠시나마 행복했어.


비록 여전히 매정한 딸은 꿈에 찾아온 아빠에게 아빠의 사망신고를 계속해서 말하지만, 이전에 나를 아프게 했던 모습 말고 내가 좋아하던 유쾌한 아빠의 모습으로 또 놀러 와줘.

아빠 핸드폰에 저장된 것처럼 ‘사랑하는 큰 딸’로서,

그때는 나도 다정한 아빠를 둔 딸의 삶을 누려볼게.

다시 만나면 사망신고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말고,

우리 그냥 행복하게 한바탕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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