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꽃이로구나

다카마쓰 여행기 3 - 히메지, 고베

by Um sinal

숙소를 옮겼다. 간사이 와이드패스를 구매했기 때문에 패스로 다니기 쉬운 곳을 거점 삼아 여행을 한다. 숙소는 히메지였고 딱히 히메지 성밖에 아는 게 없는 나는 또 성이구나 싶었지만 워낙에 유명하다고 해서 아침부터 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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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길의 끝에 성이 있다. 역에 내려서 모닝 커피를 한 잔 하면서 그동안 모아놓은 별다방 카드를 모두 꺼내보았다. 여행을 가면 지역 별다방 카드를 구매하는 것이 나의 루틴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종이로 바뀌어 좀 서운하긴 하지만 소량으로라도 충전해놓고 다음에 그 지역에 갔을 때 과거의 내가 사 주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곤 한다. 다카마쓰와 오카야마는 따로 카드가 없어서 마침 나온 벚꽃 모양의 카드를 구입했는데 시즌이라고 컵도 꽃이 잔뜩 그려져 있어 괜히 기분이 팔랑거리게 했다.


꽤 길어 보이는 길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살랑 살랑 걸어던 때는 2월 말에서 3월 초로 넘어가는 시기. 히메지 성에 도착하자 눈이 내렸다. 해가 이렇게 쨍쨍한데 소금처럼 또르륵 옷 위를 굴러 떨어지는 눈을 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구슬 아이스크림같은 눈은 금새 그쳤고, 한국보다는 한 달 정도 먼저 흘러가는 날씨 덕에 성급하게 꽃을 피운 매화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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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어보면 다들 알듯이 저 넓고 넓은 곳에 딱 세 그루 있는 나무를 전부인 것 처럼 찍기 신공을 펼쳐 보았다. 마치 공평하게 약속이라도 한 듯 홍매화와 매화가 비슷하게 피어 있었다. 히메지 성은 한바퀴 쭉 올라가면서 구경하고 내려올 수 있도록 동선이 짜여져 있어서 얼음같은 바닥에 발꼬락을 꼼지락거리며 안을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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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하지만 이 좁은 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계단을 제외하면 숨겨진 공간도 별로 없는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역시 너무 추워서 모두가 한 곳에 모여 잠을 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한겨울의 마룻바닥은 정말 발가락이 얼어버릴 것처럼 차갑다. 손발에 한기가 잘 드는 나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 바퀴 숙제하듯 돌아보고 다시 내려왔다.


다시 역 쪽으로 향하다보니 작은 아케이드가 나왔다. 여전히 날은 흐렸고 비는 오지 않았지만 쌀쌀해서 한 두시간 돌아다니고 나면 어딘가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그런 날씨였다. 길을 살펴보다가 3일에 한 끼 정도는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 가정식 컨셉으로 운영하는 식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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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거리가 너무 긴 나의 필름 카메라.. 하얀 밥과 미소시루에 한국에서는 먹지도 않을 것 같은 나물 종류들을 조그만 그릇에 정갈하게 내놓은 것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에서 여주인공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한평생 타인의 친절에 기대 살았다고. 타국에서 바라는 것 없는 타인의 친절이 가끔씩 내게 기쁨을 주곤 하는데,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고객에 대한 정성같은 게 느껴져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그래봐야 못 먹는 음식이 절반이었지만 최대한 맛을 보려고 애썼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고 히메지는 더이상 볼 곳이 없어 고베로 향했다. 고베는 15년도 더 전에 정말 돈이 없을 때 대학 후배와 함께 와 본 것이 처음이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데 둘 다 돈이 없어 쉽사리 별다방에도 들어가지 못하던 그런 때였다. 서로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이러다가 의 상하겠다 싶어 내가 아이스 커피를 사겠다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의 고베는 이국적이고 부유해보이는 그런 도시였는데, 오사카를 아무리 가도 다시 방문할 일이 잘 없어서 겸사겸사 행선지로 정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브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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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노미야역에 내리자 이미 날이 어둑했다. 어차피 고베는 야경을 보러 오는 곳. 저 멀리 빨간 조형물이 보이니 내가 고베에 왔구나 실감이 났다. 신기한 건 10년만에 왔는데도 아직 그대로 있는 건물들. 지진 박불관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아보지 못했고 그 외에 달라진 건 바다 앞에 아주 큰 별다방이 생겼다는 것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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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오브 고베에 빨간 불이 켜지고, 사람이 잔뜩 모여 있어 무슨 일이지 하고 있던 찰나 저 멀리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시작된 꽃놀이가 이렇게 불꽃으로 마무리를 하는구나. 계획 없이 보게 된 이벤트에 잠시 여행자의 행복을 찾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리 JJJJJJJJ지만 나라고 분 초 단위로 모든 것을 찾아보고 올 순 없는 노릇이고, 오늘 이 시간에 고베에 서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날이었으므로. 마치 우연히 길에서 첫사랑을 마주친 것처럼 오랫동안 터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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