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떠나야겠니?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쉴 수 있잖아. 너 이제 나이도 있는데 언제 시집을 가려고 그래?”
“엄마, 나는 지금 아프다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야.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아? 시집은커녕 길거리에서 한국말을 듣는 것조차도 힘들어.”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엄마 앞에서 대놓고 눈물을 보였다. 서른이 넘은 딸이 회사를 잘린 것도 모자라 연고도 없는 외국으로 떠나겠다는 말에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엄마의 걱정보다는 내가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먼저였다. 하지만 도저히 한국에서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미 나는 열심히 살만큼 살아왔다. 그런데 결과가 이 모양인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이제 좀 대놓고 울어도 된다. 참을 만큼 참았단 말이다.
입사지원서를 넣은 회사만 365곳. 패션업계에서 일하는 커리어 우먼을 그리며 대학교 때부터 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회사를 다녔다. 공백기 동안 경력을 쌓기 위해 다녔던 자잘한 단기 아르바이트까지 합치면 발가락을 보태도 셀 수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내 성질머리와 그 바닥은 맞지 않았다. 수정액을 흔드는 소리까지도 간섭하는 선배와 등을 지고 일하다 결국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쓸 때 없는 패기는 내 경력을 패대기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너무 촘촘히 계획했던 커리어 패스. 그때는 몰랐다. 무조건 열심히 노력만 하면 하늘이 도와서라도 내가 계획한 길에 도달할 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세 번째, 이 길이 아니면 그동안의 내 노력이 무의미해진다는 두려움은 나를 몰아치는 매몰비용의 오류 그 자체였다. 콩코드 여객기가 비효율성과 위험을 감내하고도 그간 투자한 것이 아까워서 끝까지 비행을 고집했듯 나 역시 포기를 몰랐다. 잠시 멈추어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더니 결국 추락하고 만 것이다. 나는 결국 꿈도 열정도 잃어버렸다. 헝겊 쪼가리의 올이 계속 풀려버리듯 더 이상 붙잡을 끈기도 없어지고, 헝클어진 감정을 매듭 지을 수도 없었다. 번아웃이 온 것이다.
회사에서의 나는 뾰족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낭중지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가만히 있어도 재능이 비집고 나올 만큼 남의 눈에 띄는 능력자? 훗, 그런 칭찬이었으면 좋았으련만. 다가가면 찔릴 것 같은 냉정한 사람이라는 얘기다. 면접에서는 생존본능처럼 사글사글했던 나는 일만 손에 쥐면 어떻게든 성과를 내고 싶어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인정받고 싶었다. 뒤처진 경력을 좀 올려보려고 일 욕심을 낸 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는 뒷전이 돼버렸다. 그래서 회사에 안 좋은 상황이 오면 1순위 퇴출자는 내가 되었다. 결국 회사는 나를 내쳤다. 하도 당하다 보니 퇴근시간대쯤 회의실로 부르거나 낌새가 안 좋으면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선견지명도 생겼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 회사와 맞지 않는 것 같으니 이번 주까지만 나와도 한 달 치 월급을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권고사직이라고 친절하게 포장하고 싶었겠지. 내가 니들과 친하지 못해서, 그런데 일도 그렇게 만족할 만큼 잘하진 못해서, 그래서 해고하는 거라고 솔직히 말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나는 녹음을 이어나갔다. 친화력은 좋지 못했지만 순발력은 그럴듯했지.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나 싫다는 회사는 나도 싫으니 제안해준 대로 떠나버리거나, 부당하게 쫓겨나는 것에 대항하는 것. 잠시 내 배를 채우느냐, 굶더라도 내 밥그릇은 찾아오느냐.
결국 나는 회사와 싸웠다. 갑을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분풀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이제 뵈는 게 없다. 더 이상 옮겨갈 회사도 없이 내 경력이 절단 났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싸워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