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심지 Mar 29. 2021

마녀사냥

경력 절단녀 : 스스로 경력을 절단내버리다.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뭘 크게 잘못하거나 일을 못해서는 아니야. 다만 우리 팀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지. 차라리 빨리 결정을 하고 각자가 갈 길을 알아보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나 싶어서.”

 “그러니까 지금 저를 해고하신다는 거죠?”

 부장은 에둘러 표현하던 그 문장이 한 단어로 요약되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 미안한 마음이야 알겠지만 그 결정도 당신 머리에서 나온 거잖아.

 밖은 칼퇴근을 하는 직원들의 들뜬 목소리로 시끌벅적한데 회의실 안은 더없이 고요하고 건조했다. 곧 그 적막함을 깨는 울음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도 이것만은 분명히 적시했다.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사전에 아무런 조율도 없이 회사를 일주일 이내 정리하라는 것. 즉, 해고 통보를 30일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부당해고다.

 이 불행한 소식에 내 몸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만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놓치지 않고 이 상황을 녹음하고 있었다. 그런데 버튼을 잘못 눌러 방금 녹음한 것이 재생이 되고 말았다. 금세 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부장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비참했지만 다음 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야 했다. 어쩐 일인지 인사팀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부장과 상무에게 참조를 달아 인사팀에 메일을 보냈다. 부장을 통해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으니 서면으로 공식 통보를 해주거나 후속 조치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몇 시간 뒤, 상무가 나를 혼자 회의실로 불렀다. 이 일이 있기 전 누구보다도 나에게 잘해주었던 그였다. 그러나 내가 회의실로 들어가자 상무는 나를 노려보며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오라고 윽박을 지른다. 어제 녹음했던 것을 백업도 못해놨고, 나는 회사의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녹음을 할까 봐 걱정을 하는 것 같아서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녹음되고 있지 않은- 바탕화면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주 요망한 년이라는 듯 계속해서 소리를 지른다. 급기야는 내 휴대폰을 뺏으려고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서 회의실을 뛰쳐나왔다. 나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여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밖에서 듣고 있던 인사팀장님이 나를 일으켜 세웠지만 고른 숨을 쉴 수 없었고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 두렵게 만든 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는 게 상무님에 대한 예의라는 인사팀장님의 반응이었다.

 “얘 왜 이러니? 너 무슨 병 있니?”

 인사팀장님은 내가 회사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 미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역시 이 회사에 내 편은 없는 것이다. 동정 따위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인사팀장님은 기어이 나를 회의실로 다시 구겨 넣었다. 대신 물을 건네주었지만 손이 덜덜 떨려서 잔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런 나를 여전히 노려보는 상무는 그동안 내가 순진한 척하면서 날카로운 손톱을 감추고 있던 거라는 둥 마녀 취급을 하고 있었다. 매출이 안 나오는 걸 아랫사람 탓으로 돌리는 물갈이 치고는 너무 치졸하다. 애초에 과장급 직원을 뽑는 자리에 경력도 부족한 나를 뽑아놓고, 이제 와서 괜히 흠집을 키워 환불을 요구하는 꼴 아닌가. 대체 뭐가 그리 떳떳한지 상무는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다.      

  흔히들 회사와의 싸움은 이기기 힘들기 때문에 나만 닥치고 나만 다치면 될 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마녀사냥처럼 온갖 악담을 들어가며 내쫓아내는 것에는 결코 침묵할 수 없다. 이렇게 쉽게 사람을 쓰고 버리는 일을 당연하고 당당하게 구는 행태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내가 겪은 일과 비슷한 판례를 뒤져가며 부당해고의 증빙자료를 만들었다. 그것들을 대여섯 명의 노무사분들에게 보여드렸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어쨌든 회사는 나가면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

 회사도 역시나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병가를 내면 인사위원회까지 열어 진단서를 요구했다. 절차에 따라 서류를 제출하면 그 꼴도 보기 싫다며 전혀 상관도 없는 팀의 아르바이트 자리로 전보를 보냈다. 옮겨간 팀의 팀장은 나를 곧장 창고로 보내버렸다. 이건 뭐 신데렐라도 아니고. 이렇게라도 해서 내가 혼자 나가떨어지길 바라는 거겠지.


 회사에 대항하는 것에 대한 형벌은 역시나 버거운 일이었다. 상무는 같은 층에도 머물지 못하게 하라며 나를 지하 사무실로 내쫓아버렸고, 익숙한 얼굴들도 이내 안면을 바꿨다. 무엇보다도 힘든 건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자괴감이었다. 어차피 회사는 노동과 돈을 주고받는 그 정도의 의리가 전부인데 겨우 을(乙)인 내가 뭘 기대했던 거지? 미련하게도 그때 회사는 나의 전부였다. 그런 회사가 날 버린 것이다. 마치 고아가 된 냥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지가 막막해져 버렸다.      


 결국 근로자의 권리 문제를 전문으로 조정하는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다. 월급이 적은 덕분에 국선노무사도 배정되었다. 연봉이 낮은 게 이럴 땐 쓸모가 있다. 그에 맞서 회사도 변호사를 선임했다. 회사의 재량권을 좀 더 폭넓게 보기 때문에 부당해고보다도 더 힘들다는 부당전보. 이 버거운 재판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과연 진짜 마녀는 누가 될까?

매거진의 이전글 갑을전쟁, 나는 회사와 싸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