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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May 29. 2021

옥따비오 빠스 「시인의 숙명」 「태양의 돌」

그런 책이 있다. 무심코 꺼내들었는데, 그래서 그냥 펼쳐들어 읽어보았는데 언어가 거대하게 다가와서 잠깐 감상하고 치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것 말이다. 오늘 집어 든 옥따비오 빠스의 시집이 그렇다. 그냥 빼곡히 꽂혀있는 시집 중 한 권을 집어 들었을 뿐인데, 난 어마어마한 세상을 펼쳐든 것이다.



이 책은 옥타비오 빠스 시선 『태양의 돌』이다. '고대 멕시코 아즈텍 제국의 태양력을 보고 영감을 얻어 지은 옥타비오 빠스의 역작'이라고 한다. 1990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예전부터 책장에 있었지만 이 책한테 미안하게도 이제야 펼쳐보게 되었다. 조만간 다시 꺼내들어 제대로 음미해보아야겠다. 오늘은 일단 간단하게 시 두 편을 감상하고자 한다.






시인의 숙명







말은?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나를 말들 속에 사라지게 하라,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뉘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나의 생이 별다른 계획에서 벼루어진 것이랴. 시도, 시인도 바람에서 왔다 바람으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일 터. 그것이 빛이라면 빛 속에 황홀하게 돌아가는 일정일 거고.

(26쪽, 민용태 해설)



태양의 돌







-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 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도리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는 혼자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 - 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1952년 발표한 「태양의 돌」이라는 장시에서 488행부터 525행까지 번역.
·산다는 것은 결국 끝없이 내가 남이 되어가는 작업. 나의 순간 순간의 죽음은 곧 나의 삶의 진행 방법이다.

(58,59쪽 민용태 해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출처: 「태양의 돌」 중에서)





알 듯 말 듯, 철학적이고 심오한 예술작품 속으로 풍덩 빠져든 느낌이다. 이 얇은 시집 한 권 속에 존재와 소멸, 우주의 깊이가 다 담긴 듯하다. 사색의 시간을 누리고 싶을 때 이 책을 다시 꺼내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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