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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접몽 Jun 25. 2021

이생진 시 「설교하는 바다」「절망」「술에 취한 바다」外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시집은 이생진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다. 사실 오래전, 나도 제주도 여행을 올 때 이 시집을 가지고 온 적이 있다. 이 책은 내가 책을 그다지 읽지 않던 시절에도 머리말이 나를 사로잡았으니 말이다. 






머리말




햇볕이 쨍쨍 쪼이는 날 어느날이고 제주도 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에 뛰어들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시집에서 시를 읽지 않고 바다에서 시를 읽을 겁니다. 그 때 당신은 이 시집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시를 읽는 것입니다. 성산포에 가거든 이 시집을 가지고 가십시오. 이 시집의 고향은 성산포랍니다.


(출처: 『그리운 바다 성산포』 머리말 전문)



그 어느 날 제주도 여행을 하며 성산포에 가서 주섬주섬 이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아무도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대로 해보고 싶었으나 막상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니 쭈뼛쭈뼛, 내 마음은 이미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어쨌든 꽤나 오랜만에 이 시집을 꺼내들었는데, 머리말은 여전히 똑똑히 생각나는 것은 그 시절의 내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이미 시집의 시를 읽기 전에 나의 시를 읽고 그 시절의 나를 읽었으니, 이 시집의 고향은 지금 여기.


이생진 시인이 1978년 성산포에서 쓴 책이라는 것을 처음 보는 듯 새로웠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81편의 시 가운데 1에서 24까지는 1975년 여름에 성산포에서 쓴 것이고, 25에서 81까지의 57편은 1978년 초봄 그곳에서 바다를 보며 정리한 것들이라고 한다. 그중 몇 편을 감상해보아야겠다.







2 설교하는 바다




城山浦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11 절망

城山浦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12 술에 취한 바다

城山浦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45 고독

나는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79 그리운 바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거다







시인의 감성이 아니면 이런 시어들이 튀어나올 수 없을 거다. 바다를 보며 '바다다~~~! 아, 좋다!'하는 나는 언제쯤 바다에서 시를 읽을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바다를 더 취하게 할 수 있을까. 오늘은 이생진 시인의 시를 보며 바다를 생각하지만, 조만간 바다를 보며 시를 떠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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