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일상, 그리고 공허함
울렁거림과 공허함은 연속적인 걸까?
이혼 후 혼자 된 일상에서 가장 크게 느껴진 건 나의 심적인 변화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전처와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내 속은 점점 더 뒤틀렸다. 때로는 마치 뜨거운 돌덩이가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압도하는 듯했다.
이 분노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계속해서 나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 자극은 점차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마치 에어리언이 뱃속에서 터져 나올 것처럼, 내 속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3일 동안 2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긴장해 있었다.
그때의 울렁거림과 뜨거움은 일종의 홧병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배신감이었을까?
전처가 짐을 싸서 집을 떠난 날, 이혼 서류를 제출한 날, 법원에서 이혼이 최종 확정된 날까지도 나는 흡연의 유혹을 느끼지 않았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담배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주 일요일 저녁 첫째를 고등학교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빈집에 돌아오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속이 울렁거리고, 공허함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고독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없다는 생각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시 담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떻게 이 감정을 이겨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헬스장과 독서를 시작했다.
울렁거릴 때면 무작정 집 밖으로 뛰어나가 런닝을 했다. 땀을 흘리면 잡생각이 사라졌고, 어느 순간 운동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회원권을 끊고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제는 주 3~5회, 1시간 넘게 운동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가벼워졌다. 운동 후에는 독서로 마음을 다잡았다.
나에게 심적인 안정을 주는 이 두 가지가 흡연의 욕구를 이겨낼 수 있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또한, 집에 돌아오면 혼자 식사하고 싶지 않아 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그런데 요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스스로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전처가 떠난 첫날, 나는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요리를 했다(돼지고기김치볶음밥) 그날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90분 넘게 요리를 했는데, 아이들이 일어나서 식사를 할 때는 맛이 이상하다며 몇 숟가락 먹지 않고 학교로 갔던 그날.
결국 내가 요리한 음식은 모두 음식물쓰레기통으로 버려져야 했다. 그때의 무력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후로는 간편식에 의지했다. 우유에 콘프레이크, 누룽지를 먹으며 간단하게 때웠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기 시작했다.
식당과 배달음식에 의지할 수는 없었고, 나는 조금씩 요리 레시피를 보고 직접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 아이들도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빠, 이거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일도 늘어났다.
그들이 내 요리를 인정해주기 시작한 순간, 나는 큰 위안을 느꼈다. 아이들을 위해 요리한 음식은 이제 나의 일상이자 책임이 되었다.
잘된 요리는 레시피와 사진을 기록하며, 다음번에 더 나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관계는 결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아이들과의 관계는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큰딸과의 대화는 여전히 서툴렀다. 기숙사에 데려다줄 때마다 나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라 차 안에서의 정적이 늘 무겁게 느껴졌다.
그녀도 나처럼 상처를 입었을까? 아니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학교생활은 어때? 친구들 많이 사귀었어?"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큰딸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응, 많이 사귀었어."
그녀의 대답은 짧고 건조했다. 더 이상 이어질 대화가 없었다.
예전처럼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웃던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그 벽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었다.
나는 매번 그 벽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할수록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작은딸은 나름대로 이혼 후의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었다. 체육중학교에서 2~3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 작은딸은 매번 활기찬 모습으로 나를 반겼다.
"아빠, 이번에 경기에서 이겼어!"
그 밝은 웃음은 나를 잠시나마 위로해 주었지만, 그 미소 속에서도 어딘가 슬픔이 숨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밝게 웃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빠, 다리 아파. 주물러줘."
작은딸이 다리를 내밀며 웃을 때마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혼의 상처를 극복하고 있음을 보며, 나는 그들에게서 큰 위안을 얻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나는 정말로 충분히 좋은 아빠일까? "내가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는 상반된 감정 속에서 갈등했다. 큰딸과의 거리감에 가슴이 답답해졌고, 작은딸의 밝은 미소에서 오는 위로는 잠시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더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렇게 자녀들과의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벽을 느꼈다.
나는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때로는 내가 더 이상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졌고, 책임감이 나를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지만, 그 책임이 나를 점점 더 공허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녀의 학업을 위해 학부형으로서도 더 큰 책임이 나에게 주어졌다.
첫째와 둘째의 담임 선생님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회사 업무 중에도 전화를 받았다.
그로 인해 상사에게 몇 번 잔소리를 듣기도 했고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상사에게 가정사정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짬을 내어 아이들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연차를 사용하고, 회사 생활에서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나 역시 회사생활에 집중해야 했고, 금전적인 지원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그 책임이 나를 점점 더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책임이 무거워질수록 나는 더 깊은 공허함 속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이제 나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치 내 자신을 조금씩 잃어가는 것과도 같았다.
책임감에 눌려있던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그저 매일을 버텨내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무너졌을까?"
자신에게 던진 이 질문은 대답을 찾기 힘들었지만, 어쩌면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무너질 수 없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