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다정함
대학교 막학기에 첫 취업을 시원하게 실패하고 난 직후였다.
그 무렵, 선망해 오던 관광 기업의 교내 장학 프로그램 공모전을 공지를 발견했다. 다음 공채시즌을 기다리며 공백기 동안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나는 동아줄을 잡듯 간절한 마음으로 단숨에 열댓 장의 에세이를 쏟아냈다. 운 좋게 갔던 면접까지 갈 수 있었고, 그때 들은 질문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을 왜 좋아하세요?"
취준을 하면서 자기소개, 지원동기, 기업에 대한 분석, 향후 전망 이런 상투적인 질문에 익숙해있던 터라,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억에 남는 면접질문중 하나기도 하다.
"그러게요.."
난 왜 여행을 좋아할까?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미국 깡촌은 관광객으로 붐볐던 꽤 근사한 휴양지였다. 숙박업, 요식업 등 관광과 밀접한 사업을 하시거나, 가이드를 하시는 부모님 아래서 자란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덕분에 관광산업이 한 지역을 어떻게 먹여 살리는지 알게 모르게 체화가 되었던 것 같다. 저 멀리서 온 타인을 환대하는 건, 밥벌이기에 다소 목적성이 있지만 굉장히 바람직한 일이라는 인식을 갖는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매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머무는 1-2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드문드문 콧바람을 쐬러 한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국이 참 볼 곳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근사한 곳들을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면 공동체가 언젠가 갖고 있었던 동력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남아돌았던 삼수생은 여행과 관광이 한국의 지역 불균형에 대한 그럴싸한 해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결론에 이르러 관광이란 전공을 선택하게 되었다.
지역이 가진 자원을 - 그게 자연이든, 인조물이든, 사람이든- 매력적인 이야기로 가공해서 사람들이 찾게끔 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오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10년이 넘은 지금 생각해 봐도, 한국엔 단지 서울만 있는게 아니며, 그 너머에 더 다양하고 매력적인 이야기가 있음을 알리는데 기여하는 건 여전히 정말 멋진 일이다. (당장 '24년 기준, 전체 외래관광객 1,637만 명 중 1,212만 명(74%)이 서울을 방문했다.)
외래관광객이 한국의 구석구석을 방문한다면, 한국의 다양한 모습과 문화를 경험하고 동시에 지방에 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지. 당시엔 이런 단편적인 바람을 가졌더랬다.
아무쪼록 삼수 입시생이 입시 면접장에서 덜덜 떨며 말했던 이 바람은 대학교 졸업을 유예한 취준생이 될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 아니, 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앞두기까지 군생활 포함 6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런저런 곳을 돌고 돌면서, 그 바람의 스케일도 무럭무럭 자라 아래와 같은 대답을 하기에 이르렀다.
"여행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서요."
내가 여행에서 가장 고대하는 순간은 '안도감'을 느낄 때다.
굉장한 겁보로서, 나는 낯선 상황과 공간에 대해 매우 낮은 역치를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방문하는 곳에는 무척이나 긴장하게 되는데, 조심스레 그 지역 특유의 음식, 문화, 건축물, 축제를 경험하다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군.'이라는 일종의 안도감과 함께 묵었던 긴장이 이완되는 순간을 사랑한다. 타인, 타 공동체, 타 문화, 타 국가에 대한 색안경을 깨주고, 그 사람들과 문화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직접 경험하게 해주는 것. 무지로 인해 불특정 다수에게 세워진 날을 무안하게 만드는 것. 여행의 진정한 순기능이 아닐까?
"Please be kind!"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같은 때에 여행이 굉장히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밖으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 끝나지 않는 러우전쟁 등 윗사람들이 만드는 아사리판에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안으로는 남녀갈등, 세대갈등, 별의별 갈등이 난무하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SNS, 포털 뉴스 댓글란에 보면 언제라도 누구를 물어뜯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먹잇감을 벼르고 있다.
왜 그런 걸까.
내 최애 영화 중 하나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는 꽤 설득력 있는 가설이 나온다.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요지경까지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친절하게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한다. 모두가 충돌하기 직전인 절체절명의 순간, 영화 내내 가장 무력해 보이던 인물 '웨이먼드'가 외친다.
"그러니 제발 다정해지자고요."
이 한마디에 주인공 에블린은 마음을 바꾼다. 가공할 힘으로 타인을 흠씬 두들겨 패는 대신,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싸움을 끝낸다. 그것도 놀랍도록 유쾌하게. 세상을 끝내려는 허무주의의 상징과도 같던 딸을 대상으로도 마찬가지다.
"돌고 돌아.."
그런 의미에서 여행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행은 사람을 다정하게 만든다. 현지인이 자주 가는 곳에 현지인의 방식으로 며칠간 돌고 돌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다. 기대에 한참을 못 미치는 여행지에서도 속상하다가도 현지인의 다정함에 마음이 언제 그랬었냐는 듯 사르르 녹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쉽지만 그래도 어떠한가. 그것도 사람 사는 세상인걸.
내게 좋은 게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만 보여주려 하는 알고리즘과, 중간이 없는 커뮤니티, 결국 내가 지게 되는 SNS을 비롯한 온라인 세상보다 콧바람 쐬며 이리저리 돌고 도는 게 여러모로 남는 장사이지 않을까. 어디서든, 당했던 것보다 받았던 다정함에 집중하고 그걸 돌고 돌다 나에게 올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 - 그게 여행이 만들 수 있는 선순환일 것이다.
그래서 난, 사람들이 더 많이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 꼭 멀리 떠날 필요는 없다. 날씨도 풀렸겠다, 당장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낯선 노선을 타고, 모르는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낯섦을 마주하고, 그 안에서 다정함을 발견하는 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요즘이다. 날씨가 좋음 다 좋은 단순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