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라 Feb 20. 2022

이별의 카운트다운

벌새와 나의 이야기 20

6월 17일. 본격적으로 여행짐을 싸기 전에 3박4일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던 전날 밤 옆집 부엌창 앞으로 벌새 피더를 옮겨두고, 옆집 어른에게 매일 아침 피더의 넥타를 갈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부엌 식탁에 앉아 이른 아침을 먹으면서 유리창밖을 보았더니, '승호(존승호 또는 존스노우)'는 옆집 앞으로 피더가 옮겨간 것도 모르고 일단 우리집 앞 피더 자리로 날아왔다. 그러고는 피더가 없어진 걸 알고 혼비백산한 날갯짓으로 그곳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마치 "내 눈이 잘못 된 건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옆집 피더로 시선을 돌리더니 미련없이 날아갔다. 하루에 수백송이 꽃을 옮겨다니며 넥타를 먹는 새들이고, 우리집 피더가 하루 이틀 사라진다고 해서 굶을 새들도 아니니까 큰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워싱턴 DC의 지인집만 방문하기로 했다가, 다른 지인들과 연락이 되어 뉴욕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3박4일만에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9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옆집 어른께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피더를 다시 우리집앞으로 옮겨오는데 어른께서 말씀하셨다. "승호가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더라. 내가 유리창 앞에 나타나면 승호가 낯설어서 곧바로 도망을 치더라니까!" 하긴, 존스노우가 처음엔 나한테도 그랬다. 나에게 신뢰를 갖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피더를 원래 자리에 옮겨놓은 첫날, 승호는 아주 가끔씩만 나타날 뿐이었다. 마치 나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기라도 하듯이... 그러다 이튿날부터 좀더 자주 나타나고, 토마토 와이어에도 오래 앉아 있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자기도 "원위치" 한 느낌이랄까? 그렇다 치더라도 피더에 찾아오는 회수 자체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내가 없어서 어딘가 다른 곳의 피더를 발굴하여 방문하는 느낌이랄까? 승호가 뭔가 대책을 마련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관리하는 피더가 여러 개였고, 우리집 피더는 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피더에 25% 농도의 설탕용액을 넣지만(자연 상태의 꽃에 든 넥타의 당도), 나는 33%를 넣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40%나 50% 용액을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바람둥이 승호... 그렇게 생각하니 승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절반 가량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그런 기재가 있는 것 같다. 애착을 덜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알면, 일부러 그 대상을 미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뜨거운 물에 찬물을 섞어 미지근한 물을 만들듯이... 무엇보다 내가 없으면 상대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다가, 나 없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결국 이별의 완성은 내가 스스로 상대를 놓아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쉬움이 너무나 많았다. 실컷 사랑하고 누렸다는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아쉬움은 벌새와 나와의 인연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벌새 때문에 언젠가 그곳을 다시 방문하게 될지도 모르고, 벌새 때문에 텍사스나 아리조나, 조지아, 캘리포니아에 있는 지인들을 방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집착은 언젠가 그리움의 에너지를 빌려 다른 종류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나라로 돌아가 살더라도 한동안은 새벽에 잠이 깨어 ‘여기가 어디지?’라며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처음 미국에 와서 몇 달간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디에 누워있는지, 어떤 방향인지 전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마치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 떠 있는 듯한 그 막막한 느낌 말이다. 몇날 며칠간 철새 이동을 하며 낯선 가지에서 불안한 잠을 자다 깨어날 벌새들처럼, 내 마음도 새로운 공간에 안착할 그날까지는 늘 여행자의 우수에 허덕일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조지아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는 동안 지인들과 이웃들이 꾸준히 맛있는 음식들을 먹여주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철새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벌새들처럼 오동통하게 살이 올랐다. 그토록 지겹게 느껴서 떠나고만 싶었던 동네에서 미처 가보지 못했던 좋은 장소들을 매일 새로 발견하고 오히려 그 동네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든 친구들은 왜 그토록 애틋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건지... 비행기표를 바꿔서 18일이나 더 머무르기로 했지만 그 날들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고 있었고, 뒤뜰의 나팔꽃은 속절없이 아름다웠다. 



작가의 이전글 카이저 수염의 미남 사진가 후안 바하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