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19
후안 바하몬 박사는 내가 페북의 벌새 사진 동호회에 가입한 후 알게 된 에콰도르 출신 벌새 사진가이다. 사진들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진에 덧붙인 설명과 감상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나는 소심하게 그의 사진에 '좋아요'만 누르면서 남미에 사는 다양한 벌새들에 대해, 또 그들을 사진에 담는 기술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마트에 가면 반드시 필리핀산이 아닌 에콰도르산 바나나를 구매했고, 바나나의 맛에서 후안 바하몬이 숨쉬는 공기와 그곳에 사는 벌새들을 상상했다.
그렇게 완벽한 사진을 찍는 분도 매번 벌새 사진 촬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엄지손가락 크기밖에 되지 않는 벌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쉬고 있거나 편안하게 벌새 피더에서 설탕물을 빨고 있는 장면을 찍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내게는 이것도 벅찼다), 실제 자연 환경에서 아름답게 핀 꽃 위에서 날갯짓을 하면서 넥타를 먹고 있는 장면을, 그것도 정면에서 눈동자까지 선명하게 찍기는 정말 어렵다. 스튜디오 촬영이 아니기에 하늘에 구름이 끼어도 큰 영향을 준다. 어쩌다 겨우 완벽한 설정 속에 벌새가 나타났으나 벌새가 등짝만 보이고 있거나 다 시들어빠진 꽃에서 꿀을 먹거나, 교묘하게 꽃 뒤에 숨어서 꿀을 먹어도 안 된다. 끝없는 인내심과 헌신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그 중에서 한두 장의 사진을 건졌을 때의 희열은 크다고 했다.
또한 해당 벌새가 완벽한 햇빛 조명 아래 얼굴을 드러내고 꿀을 먹는 행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확한 움직임과 표정을 육안으로 포착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초고속 셔터기술을 활용해서 새의 동작을 찍으면서도 새의 눈동자와 얼굴 표정까지 정확히 담아내야 하므로 1천장 찍어야 겨우 1장 건진다는 것이다. 후안은 이 새들의 전투를 'aerial dogfight(공중 개싸움)'으로, 이 새들을 'acrobatic wrestlers(곡예 씨름꾼)'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후안은 그 새들의 동작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를 'freeze the activity on a fraction of time'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freeze는 '얼린다'는 뜻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동작을 고정시키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사진 속에서 새 두 마리는 날개로 서로를 붙잡고 드잡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은 취미일 뿐이라고 해서 그의 본업이 궁금했던 나는, 그에 대해 좀더 알고 싶어서 용기를 내어 페북친구 신청을 했다. 페북 프로필 사진에서 보면 후안 바하몬은 검은 머리에 두꺼운 눈썹, 날카로운 눈동자, 갸름한 얼굴에 카이저 수염을 단, 그래서 어딘가 살바도르 달리 느낌이 나는 미남 청년이었다. 그런 분이 과연 나의 제안을 받아줄지 염려되어 메신저로 간단하게 내 소개와 친구 신청을 한 이유를 밝혔다. 후안 바하몬은 지극히 말을 아끼면서 흔쾌히 친구가 되어주었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분의 페북 친구가 되어 그분의 페북 친구들이 볼 수 있는 개인 사진들과 게시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어디에서도 카이저 수염의 살바도르 달리를 닮은 청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내용을 보니 손자가 왔었다, 아들이 다녀갔다...뭐 이런 건 있는데 어디에도 후안 바하몬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후좌우 내용들을 통해 추리하다가, 나는 결국 후안 바하몬의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줄곧 사진들 속에 있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사모하고 존경하던 사진작가 후안 바하몬은 바로바로 턱선이 사라진 얼굴에 배가 볼록 나온 후덕한 흰머리 할아버지였다. 프로필 사진 속의 청년은 아마 3-40년 전 후안 바하몬인 모양이었다. 그의 아들의 얼굴에서 사진 속 청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이게 몇 주일씩 고민해서 친구 신청을 보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친구 수락을 기다렸던 노력에 대한 대가였던가! 후안 바하몬이 '지극히 말을 아끼면서' 친구 수락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아...첫사랑을 다시 만나선 안 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존경하는 페친의 실물도 보려 하면 안 된다.
실망은 잠시, 후안 바하몬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가까이 다가간 보람은 분명히 있었다. 에콰도르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던 후안은 고생 끝에 미국으로 넘어가서 어찌어찌하여 신경외과 의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은퇴후에 고국에서 가까운 텍사스 남부에 살면서 벌새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자주 에콰도르를 방문하면서 남미의 다양한 벌새들을 연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자비를 들여 최고급 카메라와 장비를 마련했고, 순수한 취미생활로 전문가 뺨치는 사진을 찍는다. 최근에는 전세계 벌새 사진가들을 모아서 1년에 한번씩 함께 벌새 탐조 및 촬영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는 또한 신경외과 의사답게 '허밍버드 사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내용인즉, 자기가 다룬 신경외과 환자 중에서 끝없이 넘어지는 증세를 보인 남자 노인이 있었는데, 검사하는 과정에서 후안 바하몬 박사가 가장 우려한 뇌질환인 '허밍버드 사인'이 뇌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MRI를 찍었을 때 뇌에 나타나는 모양이 마치 허밍버드의 날카로운 부리가 위쪽을 향한 듯한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래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후안 바하몬 박사는 이 모양에 정확히 일치하게 찍은 벌새 사진을 옆에 대치시켜두었다. 벌새를 끔찍히 사랑하지만, 인간의 뇌 속에 이런 사인이 나타나는 건 죽음의 경고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땐, 후안 바하몬의 친구인 게 너무 영광스러웠다.
그 후로도 나는 후안 바하몬 박사가 올리는 허밍버드 사진에 꾸준히 '좋아요'나 '놀라워요'를 누른다. 돈을 모아서 언젠가 그분의 벌새 탐조 촬영 여행에 동참하리라는 야무진 꿈을 키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