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와 나의 이야기 18
존승호의 투명한 눈동자에 우리집 풍경과 하늘까지 담겼다. 전문가의 사진만큼 선명하진 않지만 1년 전 내가 처음 찍은 벌새 사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오로지 '나를 제대로 찍어라'라는 말 한 마디로 벌새는 나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이다.
5월 20일경, 기쁘지만 슬픈 소식이 날아왔다. 남편의 박사논문이 최종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곧 남편의 지도교수님이 남편의 논문이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인정하고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편은 박사과정 중에 학교를 옮겼고, 더 빨리 끝내기 위해 옮긴 학교에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석박사 합쳐서 넉넉히 7년만에 끝내고 돌아가리라고 예상했는데 1년 1년 연장된 세월이 11년으로 늘어났다. 영영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던 무렵 운좋게 바라던 소식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이 구질구질한 유학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구나! 비록 발에 밟힐 정도로 흔한 게 박사고 박사학위를 딴다고 해서 제깍 교수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박사과정 이야기는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나의 벌새 존스노우를 내가 먼저 떠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심심풀이로 시작한 취미생활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깊은 정이 들고 말았다. 하필 그날따라 햇빛은 눈부셨고 벌새들의 개체수도 부쩍 늘어났다. 거의 2분에 한번씩 벌새들이 내 피더에 방문해서 목을 축이고 갔다. 그들의 모습을 최대한 내 눈 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피더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내가 바깥에 나가 있어도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았다. 팔다리에 모기 방지 스프레이를 뿌린 후 DSLR 카메라를 들고 조용히 바깥으로 나갔다. 유리창이라는 장애물이 없이, 꽤 가까운 곳에서 '1천분의 1초' 이상의 속도로 촬영했더니 비로소 내가 원했던 깃털 한 올 한 올까지 살아 있는 사진이 나오기 시작했다. 벌새의 날개 회전 속도는 1초에 50-60회 정도 된다지만, 워낙 방향 전환과 움직임 자체가 빠르기 때문에 결국 1천분의 1초 이상의 속도가 되어야 날개 모양까지 잡을 수 있다.
마침 '존승호'도 내 앞에서 겁내지 않고 대담하게 포즈를 취해주었고, 나도 손이 덜 떨렸다. 존승호의 투명한 눈동자에 우리집 풍경과 하늘까지 담겼다. 전문가의 사진만큼 선명하진 않지만 1년 전 내가 처음 찍은 벌새 사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오로지 '나를 제대로 찍어라'라는 말 한 마디로 벌새는 나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왜 좀더 빨리 노력하고 배워서 좋은 사진을 확보하지 못했는지, 왜 더 부지런하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게다가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5월 25일이고, 비자가 허락하는 기간 제한 때문에 늦어도 7월 전까지 이곳을 떠나야 한다. 두달 남짓한 기간 동안 지난 11년간의 유학살림을 모두 처분해야 한다.
햇빛의 상태, 존승호의 변덕스러운 마음과 속도, 외부 방해물, 카메라 설정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맞아 떨어져도 만족스러운 사진 한 장 건질까 말까였는데, 남겨진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출국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자 사람들을 만나고 짐정리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벌새 사진을 찍기 어려웠다. 이 일 저 일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부엌으로 달려가보면 존스노우가 앉은 토마토지지대는 이미 깊은 그늘에 잠겨 있곤 했다.
다음날부터 매일매일 존승호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잠시 비가 그치고 해가 난 틈을 타서 뒤뜰에 나가 사진을 찍는데, 옆집 어른께서 벌새를 보고 싶다고 찾아오셨다. 어른과 함께 숨죽이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 존승호가 피더로 다가왔다. 빗물에 깨끗하게 씻긴 존승호의 깃털이 햇살을 튕겨내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이런 아름다움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순간, 어른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너무나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어른에게 방해가 될까봐 참았다.
잠시 후 새가 날아가버리고, 옆집 어른도 집으로 돌아가신 후 햇빛도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한 10분 동안 더 무거운 카메라 들고 서 있었지만 새는 나타나지 않았다. 최고의 순간은 언제나 찰나밖에 지속되지 않고,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존승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애틋해서, 정말 아무에게도 빼앗기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