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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Feb 22. 2022

See you on the other side!

벌새와 나의 이야기 21

존스노우만큼이나 이별하기 힘들었던 존재는 바로 존(Joan) 선생님이었다. 85세의 존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존스노우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존 선생님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벌새 피더를 설치하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존 선생님은 내게 멘토이자 어머니요, 성소 같은 분이었다.    


한국에서 처음 미국 인디애나주로 왔을 때 우리 부부는 30대 중반이었고, 또래 한국인 유학생 친구들이 있었기에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남편이 인디애나주에서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조지아주로 옮길 무렵 우리는 마흔을 넘긴 나이였다. 학업을 포함하여 인생의 많은 계획들이 어긋나면서 산속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저속으로 달리는 것만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해는 점점 저물어가는데, 외길이어서 한번 들어서면 후진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그 길이 언제 끝날지 어디로 이어질지는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는....       


그런 나날 속에서 우연히 지인을 따라간 곳이 존 선생님의 추수감사절 파티였다. 숲속에 자리한 그리스풍 저택에는 여든이 넘은 존 할머니와 노먼 할아버지 부부가 일주일 동안 준비한 음식들이 풍성히 차려져 있었다. 동양인을 포함하여 서른 명 넘는 식객들이 가득했고, 음식은 모두 공짜였다. 부엌에 계신 존 선생님에게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10년은 입은 듯한 티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백발의 할머니가 “우리 집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와”라고 말씀하셨다. 그 음식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걱정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체험을 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기회만 되면 친구들에게 묻어서 존 선생님 댁에 따라갔다. 존 선생님의 요리교실에도 참가하고, 영어수업에도 참가했다.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존 선생님의 레시피를 모아 요리책도 만들었고, 존 선생님의 인생에 관한 자서전 다큐멘터리도 만들면서 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괴롭거나 심란하면 무조건 찾아가서 말씀드리고 위안을 얻었다. 특히 존 선생님이 만들어주시는 케이크, 쿠키, 샌드위치, 샐러드, 그라놀라, 파이는 하나같이 맛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선생님의 부엌은 내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이었고, 그곳 창가에서 처음으로 벌새를 관찰했다.      



85세인 존 선생님과 지금 헤어진다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다음 세상에서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존 선생님은 내게 요리뿐만 아니라 사람과 새와 꽃과 동물들을 먹이는 일의 기쁨을 가르쳐주셨다. 그 일은 존 선생님의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가장 가난한 시절에도 벌새들을 위한 설탕을 남겨두었을 정도라고 했다.     

 

출국 전 마지막으로 존 선생님을 찾아간 날, 우리는 뒤뜰 테라스에 앉아 벌새들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는 농담처럼 “존스노우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진심이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15분가량 떨어진 존 선생님의 집 피더에 존스노우가 날아오지는 않는지 알고 싶어서 피더 주변의 벌새들을 한 마리 한 마리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벌새들 중에 나의 존스노우는 없었다. 존스노우는 부리가 독특하게 휘어 있고, 여기저기 흠집이 많아서 구분하기 쉬웠는데, 그곳의 수컷 벌새들은 모두 부리가 매끈하고 흠이 없었다.      


나는 벌새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이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실험을 해보았다. 양쪽 피더 중 한 곳으로 다가가, 벌새들이 넥타를 빨아먹는 플라스틱 꽃 근처에 입술을 바짝 갖다대고 꿀을 먹는 시늉을 해보았다. 이 피더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벌새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다. 존 선생님과 노먼 할아버지는 ‘저 애가 오늘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러나?’라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셨다. 존 선생님 부부에게 나는 5세 증손녀 키얼스틴과 동급이었다.      


내가 꿀을 먹는 시늉을 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수컷 벌새 한 마리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다. 나를 넥타를 도둑질하는 곰 정도로 생각한 게 확실했다. 벌새는 목깃털을 빨갛게 반짝이며 내 눈앞에서 붕붕거리다가 내가 물러서지 않자 같은 피더의 반대편 플라스틱 꽃구멍에서 넥타를 먹기 시작했다.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말이다!     



덕분에 나는 내 평생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카메라 줌렌즈가 아닌 내 육안으로 벌새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만발한 꽃 속에서 수컷 벌새와 먹이 경쟁을 벌이는 느낌이란... 내가 마치 또 한 마리의 벌새가 된 듯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벌새 얼굴이 곰 얼굴 만큼이나 크게 보였다. 재미있어서 두어 번 실험을 한 다음 뒤로 물러났다. 그제서야 내 의도를 파악한 존 선생님 부부가 빙그레 웃었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캠퍼스 안의 서비스베리 나무에서 다람쥐와 대치하며 베리 따먹기 경쟁을 한 적도 있다.     

  

물을 가지러 부엌에 들어갔다가, 부엌의 격자창 너머로 테라스에 앉아 계신 존 선생님의 뒷모습을 몰래 사진으로 찍었다. 1년 후에도 3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영원히 내 머릿속에 새겨질 아름다운 장면... 그 자리에 한참 서서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앞이 흐려졌다.        


존 선생님도 존스노우도 한국에 데려올 수 없었지만, 다행히 선생님의 요리책은 내 여행 가방에 올라탔다. 그 요리책으로 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먹이고, 말년에는 선생님처럼 늙어가리라 마음 먹으면서... 나는 선생님께 페이스북 사용법을 열심히 가르쳐드렸고, 선생님은 노트에 필기까지 하며 열심히 배우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약속하신 대로 페이스북에 꾸준히 들어와 내가 사는 모습을 확인하시고 내게 안부를 전하신다.  


"See you on the other side!"라는 인삿말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만나자는 뜻으로, 죽어서 이별하는 경우나 생전에 다시 만날 수 없을 경우에 하는 인삿말이다. 존선생님과 살아생전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페이스북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만남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 인삿말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다. 혹시나 선생님이 천국에 가신다 하더라도, 왠지 그곳은 인터넷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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