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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antes Yang Dec 01. 2022

나는 말년에 재입대를 했다

현실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

나는 말년에 재입대를 했다


꿈이었다.

제대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끔찍한 상황이다.


군생활을 다시는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굳이 왜 다시 하고 싶을까. 지인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한 달에 한 10억씩 월급으로 받고 제대까지 병장으로 살게 해 주면 생각해 보겠다며 그런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재입대는 꿈도 꾸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게 된다.


사회와 단절된 곳. 위병소를 경계로 해서 부대 안은 한여름에도 왠지 모르게 춥고, 부대 바깥은 공기조차도 맑게만 느껴지게 만드는 곳. 우리 때는 부대 안의 영혼이 썩어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진다고 했다. 약 2년간 근무했던 부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대략적인 기억이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빠지지 않는 게 군대 얘기. 어차피 증거는 없으니 내 입에서 나오는 군생활에서의 경험담에는 많은 조미료가 첨가된다. 누가 들으면 참전한 줄 안다. 서로 어느 정도는 과장된 얘기임을 알면서도 밤새 얘기하게 되는 게 군대 얘기다.


[사진에 효과를 넣어보니 예전에 군대에서 사진 찍을 때마다 사용했던 싸구려 일회용 사진기가 생각난다]



17,000원.


나의 부모세대 때에는 더 열악했겠지만 내가 자대 배치를 받고 이등병 때 처음으로 받은 월급이었다. 매달 첫 주가 되면 계급이 높은 순으로 행정실에 불려 가 행보관(행정보급관)이 보는 앞에서 월급을 받게 된다. 이등병 때엔 돈을 쓸 일이 없었기 때문에(정확히 말하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도, 해서도 안됐기 때문에 돈을 쓸 수가 없었다) 월급 확인만 받고 반강제로 통장에 입금되었다. 난 흡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정말로 돈을 쓸 일이 없었다. 7,000원이라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었기에 만원만 저금하겠다고 한 날에는 선임들이 돈 뜯어가냐며 분대장 호출이 이어졌고, 그날은 하루 종일 내무실 선임들의 사랑스러운 눈치를 보며 지냈어야 했다.


약 26,000원.


병장 때 월급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지도 않는 숫자다.

외박할 때 조금 쓰고, PX에 가서 냉동식품과 라면, 군것질 조금 하고. 다른 부대원들에 비해 정말 아끼고 아꼈다. 물론 제대할 때까지 행보관의 반강제성의 권유로 월급의 절반이 통장에 쌓인 덕분에 돈을 아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 제대했을 때 모아둔 돈은 약 30만원. 제대 후 집으로 가는 교통비를 포함해서 한 달 만에 다 썼던 기억이 있다.


말년휴가를 다녀와서 목요일 오후에 복귀했다. 금요일은 곧 제대라고 모든 일과에서 열외 되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부대의 배려를 받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신나게 먹고 놀았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소대장을 포함한 다른 간부들과 밤새 웃고 떠들었다.


월요일은 휴일이었다. 행보관은 그날따라 웬일로 기분이 좋았는지, 모든 부대원들에게 낮잠을 허락했다. 잠이 들은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까, 코를 찌르는 듯한 cs복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깼다.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내무실 문을 발로 있는 힘껏 차서 하는 말,


10분간 휴식 끝!

 전원 각개전투 복장 착용 후 연병장 집합 5분 전!


훈련소 시절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훈육 분대장의 소리였다.

이게 뭔 그지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난 곧 제대를 앞두고 있는데,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훈련병들은 복장을 챙겨서 미친 듯이 막사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는데, 나만 멍하니 앉아있었다.


71번 훈련병! 뭐해 인마! 나가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2년 동안 내가 버텨온 군생활이 다 꿈이었다고? 아니다. 이럴 리가 없다.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의 명령을 받았음에도 이놈의 훈련병이 정신을 못 차리니 조교는 내 머리통을 있는 힘껏 후려갈겼다.


아픔은 잠시. 2년간의 군생활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앞으로 감기를 해놓은 듯이.


...


잠에서 다시 깼다.


현실로 돌아왔다. 잠이든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후임들은 여전히 옆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고, 나 혼자 거친 숨만 계속해서 내쉬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것마저 꿈일까 봐 제대하는 순간까지 그 누구에게도 꿈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고, 밤에도 한숨도 편하게 잘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무사히 제대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이것 마저도 꿈의 일부일까 봐 위병소를 지날 때 까지는 마음을 왠지 놓지 못하겠더라.


제대 전날 꿨던 악몽은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다.


...


후기


제대 후 약 2주 뒤에 복학을 했고, 1주일 뒤에 열린 대학교 축구대회에서 골키퍼로 출전한 지 5분 만에 혼자 자빠져서 전방 십자인대가 끊겼다.


군면제는 받지 못했지만, 예비군 면제는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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