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이 지나서야 논문 심사결과를 받았다. 세 명의 리뷰어가 사이좋게 미미한 수정, 약간의 수정, 큰 수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 이번 여름방학은 논문 수정에 꼼짝없이 매달려야 하겠군.
오전에 이미지 사용 허가 요청에 여기저기 통화를 하고 논문 생각하다가 무언가 높고 두툼한 벽에 쿵 부딪힌 느낌을 받았다. 큰 수정이 필요하다고 한 리뷰어가 'needs some heavy editing'이라고 써 보낸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상황이다. 이 상태로 더 이상은 차근차근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동네 도서관을 천천히 걸어갔다. 동네 도서관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가한 약간의 오르막길을 5-10분쯤 오르면 있는 매우 좋은 산책코스다. 대출한 책을 반납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을 몇 권 찾아 그중 마음에 드는 책 3권을 골라 대출했다. 3권 모두 표지의 가장자리를 따라 테이프로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구나를 알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인기 많은 작가니까. 책 소독기에 책을 꽂아 넣고 1분 돌리고, 그래도 미심쩍어 또 1분 돌렸다.
집에 와 침대에 벌러덩 누워 책 한 권을 들어 서문을 읽는다. 흠, 재밌겠군. 그리고는 그 책을 침대에 내려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어 서문을 읽는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고, 전에 읽은 책의 서문에 뒤이은 첫 번째 에피소드 글을 읽는다. 재미있으면 저절로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다가, 흥미가 떨어지는 얘기가 나오면 그 에피소드만 마저 읽고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른 책을 집어 들어 다시 이어 읽는다.
그렇게 두 시간 반쯤 읽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100% 모르는 것은 아니다. 원래 다들 해야할 일 있으면 괜히 안하던 딴 짓하고 싶고 그러지 않나!). 다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소한 주제를 과장 없이 담백하게 기술하면서도 그 안에 자신이 바라보는 어떤 '킥'을 표현하는 것이 부럽다고 생각해왔다(킥이 아닌 척하며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것 역시 멋지다). 그러니 아마도 나는 무릎을 치게 만드는 그의 표현들을 발견하고 감탄을 하면서 자극받고 싶은 마음으로 이런 짓을 한 것 같다. 안타깝게도 논문에 써먹을 만한 문구는 아직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루키가 맛있는 굴튀김을 먹는 법이나 재즈카페 차린 이야기 등에서 그런 문구가 나올리 만무하다.
때마침(?) 대학원 논문 심사 기간에, 종강에, 학회까지 심사할 논문들을 마구 던져주는 때라서 최근엔 남의 논문만 읽으니 피폐해지는 것 같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읽는 사람에게 마음대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는 빈틈없는 문장들만 읽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읽으니 숨통이 트인달까. 물론 좋은 논문들은 그 나름대로의 앎의 기쁨을 주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튜브에서 스터디 음악을 틀어놓고 읽어도 될 만큼 수더분하지 않다. 그래서도 안되지만.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 읽은 이 2권의 무라카미 하루키 책으로 나는 논문에 대한 염려를 잠시 잊었다(고 쓰고 미뤘다고 고백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 염려를 잊기만 할 순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데드라인에 맞춰 작업을 끝내는 사람이 아니라, 완성도를 약간 포기해서라도 데드라인 며칠 전에 작업을 끝내 놔야 하는 걱정과 겁이 많은 사람이다(제발 이번엔 완성도도 좀 챙기자). 여하튼 나는 이번 여름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고 화내고 보채며 보내게 생겼다. 이런 면에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지적 성숙을 위한 활동이기보다는 정신수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