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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마 Jul 11. 2021

하와이에서 논문 쓰는 게 꿈이었다

7월 양양 시골집 정자 위에서 논문을 수정했다.

30대 초반의 나에겐 롤모델이 한 명 있었다. 철학 전공의 교수님으로 고대 철학자의 관념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계해서 설명하실 수 있는 분이다. 이런 놀라운 지적 성찰력과 더불어 내가 선망했던 부분은 교수님의 스타일이었다. 어느 날엔 블랙 테일러드 슈트를 입고 우아한 교수님의 모습을 하시다가도 어떤 날에는 레드 립에 청바지를, 또 어느 비 오는 날은 레인부츠에 과감한 주얼리를 매칭하는 변화무쌍함에 또 한 번 반했었다. 철학 쪽 학계는 매우 보수적이라고 하던데, 게다가 내가 학교에 있어보니 그분이 자유로움을 넘어서 얼마나 용감한 분인지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아마도 교육자로서 또 학자로서 부끄럽지 않으니 그런 당당함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교수님이 한 번은 다가오는 겨울방학엔 하와이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하셨다. 마침 거기에 학회도 있고 해서 한 달간 머물면서 책을 집필하신단다. 와, 겨울에 하와이로 날아가 따뜻한 햇빛이 들고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창가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니..! 상상만 해도 설렜다. 그리고 그건 곧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다.


사실 하와이는커녕 양양의 시골집도 오래 있어본 기억이 없다. 꽤 오랫동안 나는 홀로 공부하고 홀로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요즘처럼 수업하고 연구하고 쉬는 혼자의 삶이 익숙하다. 그런데 유난히 고됬던 지난 학기가 끝이 나고, 수정해야 하는 논문이 너무 막막해 주변 환경의 환기가 절실했다. 그래서 양양에 있는 집으로 랩톱과 책과 각종 논문들을 챙겨 들고 내려갔다.


삼사일쯤 있을 예정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 나무가 코앞에 보이는 창가 쪽으로 책상과 흔들의자를 끌어다 놓고 논문을 펼치니 세상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나는 한 챕터 수정을 완성했다. 다음날엔 부모님과 캠핑카로 평창과 영월, 정선을 돌았다. 산들이 내려다보이는 넓게 펼쳐진 들판, 1970년대를 재현한 재미있는 볼거리, 비가 와 짙어진 숲 향기 속의 사찰을 다니며 정말 오랜만의 여행다운 여행이었다.

남은 날들은 마당의 정자 2층에 올라 새소리를 들으며 감자전과 막걸리 한 잔을 먹다가 논문을 수정하기도 하고, 논문 보다가 계곡을 보러 가기도 했다. 생각보다 논문 수정이 잘 되었는데, 아마도 집중할 때 딱 집중하고, 집이 아닌 밖에서 공기를 쐬고 경치를 보며 잠시 뇌가 쉬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 이유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나는 11일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시골집에서의 여름방학 같은 나날들이었다. 논문도 수정을 마쳤고, 최종 정리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언제 또 내려갈 수 있나 스케줄을 보고 또 본다. 논문이 막힐 때, 문 하나만 열고 나가 꽃과 나무를 보며 슬슬 마당을 돌면 생각들이 떠올랐었지. 아마도 머지않아 새로운 논문 거리를 들고 내려갈 듯하다. 이번엔 꼭 자전거도 챙겨야지. 둑길에서 나 홀로 자전거를 못 탄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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