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가을이 시작되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옷장을 열어보며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이럴 때 가을 패션을 책임져 줄 든든한 아이템이 바로 트렌치코트다.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비바람과 추위 속에서 전투를 해야 했던 영국 군인들이 참호(trench)에서 착용했던 군용 방수 코트에서 유래했다. 모직 소재보다 가볍고 발수성이 뛰어난 개버딘이라는 면 소재에 바람에 따라 단추 여밈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더블브레스트 버튼, 총을 메는 어깨 부분의 마모와 비에 젖는 것을 방지하는 건 플랩(gun flap), 계급장, 수류탄, 지도 등을 달 수 있는 견장과 허리 벨트의 D자형 고리, 소맷단을 조일 수 있는 커프스 플랩 등이 트렌치코트가 지닌 디자인 특징이다.
이렇게 전쟁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백 년이 넘도록 사랑받는 클래식 패션 아이템을 낳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트렌치코트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애수’나 ‘카사블랑카’ 등 194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남녀 배우들이 트렌치코트를 입고 등장하면서부터다. 이후 트렌치코트는 성별과 나이,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대표적인 클래식 아이템이 되었다. 티셔츠에 운동화를 착용한 20대 여성이 입어도, 슈트를 입은 50대 남성이 입어도 멋들어지는 마법 같은 매력을 지녔다.
하지만 매 시즌 새로이 등장하는 유행은 클래식 아이템도 가만두지 않는다. 트렌치코트 역시 트렌드에 따라 길이, 색상, 소재, 디테일 등이 변주된다. 특히 올가을 트렌치코트는 매우 변화무쌍해졌다. 길이를 짧게 잘라내 재킷으로 바꾸거나 소매를 없애 망토처럼 입을 수 있도록 했다. 코트 자락을 풍성하게 만들거나 코트 위에 코르셋 디자인을 덧입혀 드레스로 변신한 디자인도 나타났다. 어깨 부분을 없애거나 코트 일부에 구멍을 내어 안을 노출시키는 디자인 또는 영화 ‘매트릭스’의 여주인공이 입을 법한 매끈한 검은 가죽 소재의 트렌치코트도 보인다.
그렇다면 트렌치코트의 다채로운 변화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필자는 팬데믹이 여기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코로나로 인한 피로와 답답함을 해소시키고자 패션에서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변화를 갈망하게 된 것은 아닐까. 완벽한 아름다움보다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의 환영이 트렌치코트의 재기 발랄한 디자인에 투영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흔히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사실 유행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과 현상들이 얽히고 맞물리면서 끝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무한한 변화가 우리 세상을 활기차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낭만적인 가을을 새롭게 변신한 트렌치코트로 만끽하면 된다.
동아일보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