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마켓 판매자분의 씁쓸한 뒷모습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 거실 한편에 150권의 전집을 쌓아 올렸습니다. 책장에 빼곡히 들어찬 책들을 보며 뿌듯한 마음도 잠시, 문득 겁이 났습니다. '이 책들도 우리 집에서 그저 예쁜 배경 화면이나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하면 어쩌지?'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었지만 제대로 읽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도 했고요.
아이들에게 "자, 아빠가 큰돈(중고지만) 들여서 사 왔으니 이제부터 매일 읽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이들에의 의욕을 꺾어버리는 악수입니다. 독려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잔소리'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당근표 전집'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한 세 가지 전략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책장에 책등만 보이게 꽂아두면 아이들에게 책은 그저 거대한 벽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거실에서 아이들의 동선이 가장 잦은 곳에 작은 독서대를 마련하고, '이번 주 아빠와 엄마의 추천 책'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놓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슬쩍 밑밥(?)을 던지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이 책은 아빠가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던 건데, 주인공의 선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어. 6학년인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 부모의 개인적인 추억과 감상이 담긴 한마디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주 강력한 '큐레이션'이 됩니다. 6학년 큰딸은 아빠의 고교 시절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고, 4학년 둘째는 아빠를 잠 못 들게 한 그 '충격'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슬며시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흔히 "무슨 내용이야? 줄거리 말해봐"라고 묻곤 합니다. 하지만 이건 독서의 즐거움을 순식간에 평가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챕터 2에서 언급했던 '자작자작'이나 독서록을 활용할 때, '마음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접근했습니다.
아이가 독서록을 작성하면 저는 그 아래에 정성껏 댓글을 답니다. "아빠는 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참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딸은 주인공이 외로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구나. 아빠가 놓친 부분을 우리 딸이 찾아줬네!" 이렇게 서로의 감상평을 주고받다 보면, 독서록은 더 이상 '해치워야 할 숙제'가 아니라 아빠와 비밀스럽게 나누는 감정의 창구가 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 아빠에게 읽히고,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비로소 다음 책을 읽을 동기를 얻습니다.
막상 독서록을 쓰려고 앉아도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며 연필만 굴리는 아이들을 위해 저는 저만의 글쓰기 프레임워크인 '배느실 인기'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다섯 글자만 기억하면 어떤 책을 읽어도 풍성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4학년 둘째에게 이 방법을 알려주었더니, "아빠, 뭐라고 써야 할지 알겠어!"라며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배느실 인기'는 아이들에게 막연한 글쓰기라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아주는 나침반과도 같았습니다.
당근마켓에서 저렴하게 사 온 책들이지만, 아빠의 관심과 '배느실 인기'라는 양념이 더해지자 아이들의 삶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더 이상 종이 뭉치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소통하고 성장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된 것입니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다면, 오늘 당장 거실 책장에 '아빠의 추천 책' 한 권을 표지가 보이게 세워두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