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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 초보 Jul 15. 2022

<버닝> 리뷰

작가의 욕망, 그리고 작가의 실패, 작가가 만들어지는 과정

분열된 욕망의 청춘, 분열된 욕망의 사회. 계속해서 두 개의 세계는 영화 속에서 충돌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실재하는 아닌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냥 영화를 볼 뿐이다. 실재에 대한 의문은 종수가 소설가 지망생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종수가 지닌 창작자의 위치는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영화가 실재하는 지 아닌지 먼저 의문을 만든다. 영화가 하나의 창작물일 뿐일 수도 있다. 픽션 그 자체의 영화 혹은 소설이 <버닝> 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글을 쓰는 장면은 이 모든 영화가 한 편의 상상은 아닐지, 아니면 이 영화 속 일부 장면은 종수의 상상이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에 익스트림 롱쇼트로 종수와 서울을 정경으로 잡는 순간 지금까지의 종수와 달리 현실에 실재하는 한 인물이 된다. 서울의 풍경과 존재하는. 이 모두가 종수의 모순된 욕망들의 표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해미는 종수의 내면이라는 우물에서 꺼낸 하나의 캐릭터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장면이다. 영화 속 해미의 자취방은 그저 종수의 원래부터 살던 자취방이 아닐까. 혹은 벤의 집이 성공한 소설가 종수의 집이거나. 종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의 일부 혹은 전체. 소설을 쓰는 장면과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마지막 시퀀스는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 단순한 둘의 합체. 두 욕망의 합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온전히 종수가 만든 소설 속의 상황일 수 있다. 분열된 자아와 욕망이 합치되는 순간. 그게 엔딩일 수도 있다. 소설을 완결한 작가가 소설 속 캐릭터를 죽이고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과정. 수많은 자신이 낳은 소설 속의 캐릭터를 하나로 합치시키는 과정이 아마도 이 영화의 엔딩일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킨 소설 속 캐릭터를 죽이는 과정. 그렇다면 <버닝>이라는 창작물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마도 분열일 것이다. 그리고 분열을 만든 욕망이다.  종수의 집은 상징적이다. 태극기가 꽂아져 있지만 저 언덕 넘어 북한의 대남방송이 들려온다. 남과 북이라는 ‘우리’라고 불리는 두 대상이 부딪혀 충돌한다. 남과 북이라는 극단적일 수 있는 두 개의 공간. 그리고 하나의 나라. 하나의 자아에서 벤과 종수가 분열된 것 같은 그런 순간이다. 종수가 보고 있는 티비에서 두 꼭지의 뉴스가 나온다. 하나는 청년 실업에 관한 뉴스, 또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의 국경 장벽과 보호 무역에 관한 뉴스. 청년 실업에 관한 뉴스는 종수, 해미라는 캐릭터와 비추어 갖은 생각을 준다. 특히나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이 사회의 청춘상을 그리는 역할을 많이 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런 이미지를 만든다. 돈을 벌고 싶은 욕망 어찌보면 가난한 우리 사회 대다수 일지 모르는 종수나 해미 같은 상황의 모습이다. 다른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벤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벤이라는 캐릭터도 특이하다. 대놓고 나오지는 않지만 우리가 벤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어설픈 한국어 발음에 벤이라는 이름 그리고 많은 돈에서, 교포 혹은 교포는 아니더라도 많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구나 추측한다. 스티븐 연이라는 배우와 트럼프 관련 뉴스를 생각한다면 연결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더 흥미로워 진다. 벤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한국과 미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분열된 캐릭터다. 분명 한국말을 하지만 벤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분열이고 모순이다. 미국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그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상류, 다른 계급을 누리는 그들이 그려진다. 부유해 보이는 벤은 친구들은 해미와 또 다른 벤의 여자를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바라본다. 춤을 추도록하고 그녀들의 에피소드에 집중한다. 트럼프의 미국과 그들의 한국은 어찌 보이는지. 종수는 분명 벤이 되었을 기회가 있었다. 중동에서 돈을 번 아버지가 소를 사지 않고 강남에 아파트를 샀다면 종수는 지금쯤 벤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종수의 벤에 대한 의심, 분노는 개츠비가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그리고 되지 않게 만든 아버지에 대한 분노일 수 있다. 단순히 해미에 대한 사랑, 집착, 벤에 대한 의심과 부러움이 아닐 것이다. 노골적인 사회에 대한 대비는 벤의 가족식사 모습을 하는 종수의 모습에도 그려진다. 종수가 바라보는 그림은 용산참사를 담은 그림이다. 한국 사회 계급의 충돌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 두 개의 계급과 계급에 대한 욕망과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들을 역겨워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굳이 비유를 쓰지 않고 영화는 직유로 나타낸다. 벤은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종수도 마찬가지다.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다. 하지만 그 장애를 아버지로만 끝낼 수 있을까? 잔혹성은 종수의 피에도 흐른다. 어머니의 옷가지를 아버지가 태우라고 했지만 단순히 아버지의 명령이었을까? 종수가 꿈에 보는 장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장면이다. 벤이 태우는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태우는 비닐하우스일지도 모른다. 종수가 과거 태운 것은 엄마의 흔적이 아닌 비닐 하우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벤이 태우는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태운 어머니의 흔적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은 벤이 아니라 종수일지도 모른다. 종수가 아침에 조깅을 하면서 찾던 것은 벤이 태울 비닐하우스가 아닌 자신이 태울 비닐 하우수일지도 모른다. 벤이 태우는 것은 결국 종수가 태우는 것이다. 종수는 벤이고 벤이 종수일수도 있다. 다른 자아의 폭력성, 다른 자아의 모습과 욕망 그게 벤이고 종수다. 종수에게도 폭력성 분노는 있다. 아버지의 헛간에 있던 수많은 칼들. 그 칼은 아버지의 칼이 맞을까?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과정은 창작자의 내면을 보는 과정이 아닐까? 잔혹성, 혹은 욕망이 있는 내면을 바라보는 과정. 종수는 안개 낀 마을 도로를 달리며 태울 만한 비닐하우스를 찾는다. 안개 같이 잘 보이지 않는 내면,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버려진 비닐 하우스 같이 자리 잡고 있는 자신 내면의 욕망이나 잔혹함을 찾는 과정으로 보인다. 창작자 종수가 소설 안에 담고자하는 욕망과 잔혹함, 진실성 같은 것을 찾는 과정 그게 비닐하우스를 탐사는 과정이 아닐까? 해미는 어느 순간 사라진다. 사라지는 이유는 쉽게 보이는 스토리대로 벤과의 연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수고 있다. 그럴 가능성도 높다. 해미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종수에게 시계를 선물 받았을 때 시계를 처음 차본다고 말한다. 시계를 차는 순간, 시간에 종속된다. 해미는 지금까지 종속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우물도 마찬가지다. 우물이 있었는지 해미가 거짓을 혹은 진실을 말하는지 쉽게 알 수 없다. 해미는 진실에도 거짓에도 종속되지 않았다. 과거도 마찬가지다. 종수의 해미에 대한 기억은 한톨 같이 가볍다. 성형수술을 한 해미의 얼굴도 과거는 없다. 시간에 그리고 공간에 종속되지 않은 해미는 춤을 추고 새털 같이 날아간 것일수도 있다. 마지막의 해미의 춤은 모든 탈출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대, 옷을 벗은 해미.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구분의 속박을 벗어났다. 그 순간은 카메라조차 해미를 버린다. 프레임이라는 카메라의 속박을 벗어난다. 옷이라는 속박을 벗어났다. 속박을 벗어나 버린 해미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을 상태로 멀리 떠난 것이다. 해미는 케냐에 있을 때 사막 언덕에 앉아서 저녁놀을 바라본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사라진 게 아니라 원래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 해미는 그렇게 춤을 추면서 원래 없었던 사람이 된 것이다. 그냥 없었던 해미 창작자의 해미가 그 속에 있지 않을까? 해미조차 종수의 욕망, 혹은 벤의 욕망이 만든 하나의 허상이고 거울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은 그러한 허상을 잘 보여준다. 맞지 않는 두 쇼트의 연결. 분명 종수가 택배 상자를 들고 지나갔던 장소와 해미가 선물 추첨을 하는 장면은 다르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첫 장면은 이후는 첫 장면과 이어서 생각한다면 연결이 되지 않는 장면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소설가 종수의 생각이라면 달라진다. 해미가 아닌 그저 모르는 내레이터 모델 한 명을 지나갔고, 그 순간 종수가 만든 상상이라면. 그런 점에서 영화에서 종수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모든 장면은 종수의 추동으로 이루어지고 종수의 추측으로 이루어진다. 종수라는 작가에 관객은 그저 따라갈 뿐이다. 해미는 그런 점에서 원래 없었을 것이다. 해미는 종수가 우물에서 꺼낸 또 다른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진심으로 종수가 추구하는 자유. 구속되지 않은 존재가 해미다. 속박을 피하고 싶은 종수는 해미를 만들었다. 해미는 종수의 또 다른 자아, 혹은 종수의 소설 속 캐릭터다. 그래서 우물은 아마도 종수의 내면 그 자체일 것이다. 내면에서 해미를 구한 순간은, 종수가 해미라는 캐릭터를 창조할 순간일 뿐이다. 해미는 원래 없었다. 종수만 있을 뿐이다. 해미가 종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해미의 창조주가 종수기 때문이다. 해미가 만들어진 순간은 아마도 종수가 어느 한 내레이터 모델을 길에서 본 순간이 아닐까? 원래 있던 종수 내면의 해미는 그렇게 인물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종수의 내면을 본 엄마에게는 우물은 있었지만, 해미의 가족에게 없었던 이유는 그게 아닐까? 해미도 벤도 종수도 모두 하나의 인물, 하나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보면 지나칠 정도 순수해 보이고 철 없는 느낌을 주는 전종서 배우의 해미 연기는 극도로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지극히 이 영화에 맞는 느낌을 준다. 벤과 종수는 어딘가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남았다. 둘은 거울 같이 보인다. 종수가 가난, 도덕, 꿈 등에 속박되었다면 벤은 부, 방종, 허무 등에 속박되었다. 종수는 소설가의 꿈을 꾼다. 대마초를 피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해미에게는 '창녀 같이 보인다'고 기준을 정하고 욕한다. 해미의 집에 들어가도 전에 자기가 살던 집보다 좋다고 말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건실한 청년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인다. 벤은 종수의 반대지점에 위치한다. 부유하고, 자신의 욕망(베이스)에 충실하고. 대마를 피우고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도덕과 윤리에서 멀어보인다. 하지만 그 모두가 소속이다. 어찌보면 방종이라는 카테고리에 소속되어 있다. 대칭의 성립은 카테고리로 구분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벤과 종수 모두 어디에 속박되어 있는 그런 인물이다. 벤은 죄가 없을 지도 모른다. 단순히 돈이 많으며, 놀기 좋아하고, 그저 때때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남자. 벤에 대한 의심은 종수가 지닌 폭력적인 자신의 피, 아버지의 피에 대한 분노이다. 벤에 대한 의심 그리고 결말은 자신,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일 뿐일 수도 있다. 벤의 종속은 이야기에 대한 열망으로 보인다 .벤과 그의 친구들은 해미, 그리고 새로운 벤의 여자를 데리고 이야기를 듣다. 그들이 흥미로워 할 이야기. 다른 세계.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이야기, 영화, 소설은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창구다. 종속을 벗어나는 도구로써 이야기.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는다. 한 명의 창작자에게 나오는 이야기를. 그들은 마치 관객처럼 보인다. 해미, 그리고 벤의 여자가 감독이고 소설가 인 것처럼. 그리고 벤과 벤의 친구들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처럼 보인다. 때때로 하품을 하고 그런 관객들.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암막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욕망에 속박된 우리는 영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없으면 어디로 떠날 수 없으니. 판토마임은 그 자체로 허구다. '없는 것이 없다는 것만 잊으면 된다'고 말한다. 영화나 소설을 보는 우리는 잊고 그 것을 수용한다. 영화나 소설은 그 자체로 현실이 된다. 우리가 영화나 소설을 그렇게 소비해야 한다. 그 과정이고 그 형태이다. 고양이 '보일'과 종수의 엄마는 원래 없었다. 그리고 관객도 의심했고, 종수도 의심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진짜, 보일인지 진짜 엄마인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믿으니 믿는다. 영화나 소설은 그런 식이다. 없는 것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믿게 되는. 벤이 종수를 의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관객이 벤을 의심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저 영화가 그렇게 믿도록 한다. 관객은 그 과정을 따라갈 뿐이다. 종수의 차가 벤의 차를 따라갔던 것처럼, 독자는 소설가의 펜을 따라서, 관객은 감독의 카메라를 따라서 그저 보여주는 대로 믿게 된다.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보여주니 그렇게 믿는다. 확실하지 않지만 우리가 그 것을 믿는 게 되는 창작의 원인은 메타포다. 파스타와 메타포의 이야기. 영화 속 모든 것은 실체와 연결되지 않는다. 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저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해미가 사라졌고, 때마침 고양이 한 마리를 기르고, 여성들의 물건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가. 다 메타포 탓이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창작자의 시선을 지나갈 때 의미가 생겨난다. 창작자는 직접적으로 아무말 하지 않지만 생겨나는 의미들. 다 메타포다. 그런 점에서 걸려오던 수많은 전화는 어머니의 전화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가 그저 익숙한 클리셰 속에서 생각했을 뿐이다. 고양이 보일도, 벤의 행동을 보고 추측하는 것도. 영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어떤 인물도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관객은 익숙한 클리셰 속에서 뻔하디 뻔한 것들을 감독의 의도대로 생각한다. 감독은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야기는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진짜 작가의 창작 혹은 관객, 독자에게 익숙한, 그들이 가진 사고와 클리셰들로. 창작하지 않은 것들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일반화된 오류로 창조된다. 이런 모순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영화는 초반에 많은 메타포를 보여준다. 시계, 판토마임, 리틀헝거, 남산에 반사되는 햇빛, 자위, 섹스 등등 그 것들의 쉽게 많은 것을 설명하고 초반에 영화의 안내서로 사용된다. 다른 이창동 감독의 영화보다 친절한 이유는 상당히 직유적인 그들의 배치다. 남산에 반사되는 햇빛은 종수에게는 한 순간의 쾌락이 된다. 해미와의 섹스, 그리고 창가를 바라보면서 하는 자위. 구질구질한 세상에서 한 순간의 쾌락은 그나마 존재하는 햇볕이다. 쾌락은 점점 커지고 더 큰 욕망을 불러왔다. 그 욕망의 소원이 이루어진 게 벤은 아닐까? 하늘이 불러준 욕망의 그림자. 종수의 또 다른 모습 그게 벤이다. 종수는 리틀 헝거가 아니였기 때문에 더 큰 욕망을 바랬다. 팔을 하늘을 향해 춤을 췄고, 그 소원을 이루어준 것처럼. 하지만 욕망 속에서 분열된 자아는 고통이 되었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은 어디에 속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낳기 때문이다.그래서 욕망에 글을 쓰고, 창작을 했지만 뭔가 되지 않는다.  종수는 성공한 창작자인가? 아닐 것이다. 우선 만들고 있는 소설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만든 글이라면 아버지의 탄원서다. 하지만 첫번째 독자는 외국인이라서 읽지 못한다. 두번째 독자는 이장이다. 읽었지만 거짓말한다고 나무란다. 아버지를 집행유예로 만들 목적이던 탄원서는 결국 실패해서 징역을 받는다. 종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실패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게 종수의 창작물이라면 종수는 자신의 글에 자신이 없음을 글 속에서 보여준다. 글의 글은 아버지의 집행유예라는 소망 혹은 욕망을 담았지만 실패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영화에도 작가는 자신감을 가지지 못했다. 욕망은 그렇게 개인을 분열시킨다. 하지만 우리에게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괴물이다. 그래서 창작한다. 그리고 그 창작자의 시선이 우리의 눈이 된다.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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