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 한 그루 몇 해 지나니 줍는 것도 성가시다
삭지 않은 잎들 태우려고 들추니
밤을 수북하게 숨겨놓았다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동안에 다람쥐도
상처 없는 알곡을 찾아 발이 부르틈을
사과의 좋은 쪽은 내어주고 흠이 있는 부분은
내가 먹는다 만개한 사과 꽃에도 흠이 섞여들었다
꽃들은 땅속만 알 수 있는 속내
꽃을 보는 일도 때로는 가식적이다
그럼에도 한 시간은 멀고 멀다
창문에 어른거리는 너의 그림자도 담아올 수 있다
그런 어른거림도 흠과 어떻게든 잡아매려 한다
내 흠을 들춰내지 않으면 날 가까이 하려는 것이다
너의 흠을 들춰내지 않으면 내게 이미 도달했다
사랑은 슬픔과도 맞닿아 있어 도무지
슬픔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다
내게 들킨 다람쥐의 알곡을 돌려줘야 하나
흠은 달콤한 식탁 위에도 쏟아졌다
나는 흠이 있는 이들과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눠먹는다
밥 한 그릇을 천천히 씹어 먹을 때에만 알 수 있듯
사람만이 알곡과 흠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인다
내일이면 비정해질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 안정옥, 흠이 있다
밤톨에도 사과에도 사과 꽃에도 흠은 섞여 있다. 너와 나에게 저마다의 흠이 있듯이.
삭지 않은 잎들 아래 수북이 쌓여 있는 밤톨을 보고 다람쥐의 부르튼 발을 떠올리는 이라면, 사과의 좋은 쪽은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흠 있는 부분은 자신의 것으로 삼을 만하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 과연 다람쥐는 상처 없는 알곡을 얼마나 찾았으려나.
또 하나의 궁금증. 꽃을 보는 일은 왜 가식적인가? 어쩌면 포인트는 ‘꽃’이 아니라 ‘보는’ 일인지도…. ‘땅속만 아는 속내’를 ‘보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테니까. 그러니 기껏해야 내가 담아올 수 있는 것도 ‘너’가 아니라 ‘너의 그림자’, 그것도 ‘창문에 어른거리는 너의 그림자’ 정도일 뿐. 멀고 먼 어른거림마저 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모든 것에 흠이 있어서일까, 모든 것에서 흠을 찾으려 했기 때문일까.
누구나 흠이 있게 마련이고, 서로에게 ‘도달한’ 존재가 되려면 흠을 들춰내지 말라는 말인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가까운 사이일수록 흠이 도드라져 보이는 법인데…. 어쨌든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
‘사람만이 알곡과 흠을 같은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구절은 사랑과 슬픔, 알곡과 흠의 공존과 필연성을 이해하는 자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로 들린다. 실은 그 다음 구절이 더 마음에 든다. 내일이면 비정해질지도 모른다는 것. ‘다람쥐의 알곡’과 ‘슬픔에 맞닿은 사랑’과 ‘달콤한 식탁위의 흠’ 따위는 외면하고서…. 어쩐지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그럼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건 ‘나는 분명’이라는 마지막 구절 때문. 어떤 말이 생략되었는지, 혹은 어떤 말 앞에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아도, 흠을 품는 마음과 비정함 사이를 오가는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