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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Feb 24. 2023

외면을 마주하는 용기


  미셀 푸코는 『담론과 진실』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육자의 역할은 아직 통합되지 않은 사람을 통합하는 일, 이들이 사회 내부로 들어가도록 돕는 일입니다. 하지만 교육자 자신도 사회 안에 존재합니다. 반면, 파레시아스트는 근본적으로 분쟁적 상황 속에 위치합니다. 그는 권력과 맞서고, 다수의 사람들이나 여론 등과 대립합니다. 이것은 교육자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파레시아스트는 통합의 역군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의 역군으로 활동합니다.”


   이 구절을 읽고 내가 학교에서 종종 느끼던 무력감의 정체를 이해했다. ‘교육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시리도록 냉정했다. ‘통합의 역군’이 가지는 한계가 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괜히 뜨끔했다. 무력감에 무감해지지 않으려고 애쓴 시간들이 파레시아스트 앞에서 초라해졌다.


  아이들을 사회에 통합시키기 위해서 나는 그간 무엇을 했나. 한계 내에서 애쓴 일련의 과정들이 결국 점수 몇 점으로 환원되는 흐름 속에서 이따금 울컥했다. 내가 그동안 해체해 온 것은 권력이나 다수의 사람, 여론 같은 게 아니라 애먼 시(詩)들이나 아니었을지. 기껏해야 기존 평설이나 보편적 해석으로의 통합을 꾀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 손택수, 「있는 그대로, 라는 말」

 

  

  평화 없이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는 구절이 가슴에 박힌다.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에게 도식화된 상징의 나열을 주입하는 일일까봐 두렵다.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이테와 비둘기, 종내 ‘너’에게 이르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대한다는 것은 어떤 경지를 의미하는 걸까. 철학자 E.레비나스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관계를 이루는 것은 <남을 알지 못함>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너를 모른다는 태도,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는 낮은 자세가 관계와 공부의 출발인 걸까. 아득하기만 한 그 말이 생을 뿌리부터 흔든다. 그간 성실히 복무해온 통합의 길에 시나브로 균열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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