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름 Nov 20. 2022

오래된 그늘과 입 다문 조개의 비유

김선태, 『그늘의 깊이』를 읽고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나는 (백화점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여자들보다 4인 가족이 더 꼴 보기 싫어. 어우, 그 철옹성.”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린 견고한 가족주의를 비꼬는 말이다. 나는 비록 4인이 아닌 3인 가족을 꾸렸지만, 그 비아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표준’에 가까운 가족상을 생활의 근거로 삼고 있으므로. 결혼하지 않은 그녀들이 말한다. “우리가 꾸리는 집구석도 우리가 나온 집구석이랑 똑같을까?” “똑같아, 똑같아. 근데 그걸 또 하고 싶어 해. 이 미련곰탱이 같은 인간이, 어휴.” 그러게, 이 집구석이나 저 집구석이나 딱히 다를 바 없는데 말이지.

  “결혼을 안 해봐서 그래.”,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지.”와 같은 말을 무람없이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내게 하는 말이 아닌데도 심히 불쾌해진다.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야만 비로소 ‘참된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건가. 도리어 제 가족 지키기에 바빠서 한없이 이기적이고 편협한 시각을 고수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화목한 가정에 대한 이상주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父)와 모(母)가 품음직한 뻔한 함의들이 참으로 고루하게 느껴지는 요즘.


  가난이라는 그늘이 싫어 필사적으로 아버지라는 철조망을 뚫고 달아났네


  슬픔이라는 그늘이 지겨워 흑흑거리며 어머니라는 눈물의 강을 헤엄쳐왔네


  폭력이라는 그늘을 되밟지 않으려 아버지라는 권위를 자진 철회하고 싶었네


  원망이라는 그늘을 남기지 않으려 어머니라는 모성 앞에 무릎 꿇고 싶었네


  허나, 가난이나 슬픔이나 폭력이나 원망의 그늘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네


  되려, 오래된 그늘에 새로운 그늘을 새끼 치며 무섭게 뻗어나가고 있었네


  오랜 삭임 끝에야 드리운다는 말갛고도 흰 그늘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네

                                                                                                          - 「그늘」


  이 시에서도 역시나 아버지는 가난(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주체), 철조망, 폭력, 권위로, 어머니는 슬픔, 눈물, 원망, 모성으로 대변된다. ‘역시나’라고 표현한 이유는 전통적인 ―이게 왜 전통이 되어야했나 안타까울 뿐이지만― 부모상에서 벗어난 바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실제 삶과의 일치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처럼 도식화된 상징성은 어딘가 불편하다. 화자도 이런 집구석을 견디기 힘들었겠지. 싫고 지겨워 되밟거나 남기지 않으려 했으니까. 하지만 왜 그는, 또 우리는 재차 그 오래된 그늘에 새로운 그늘을 새끼 치며 살고 있는 걸까. 드라마 속 대사 ‘미련 곰탱이’처럼. 대를 이어 반복되는 부모의 그늘, 가족의 그늘. 누군가에겐 확고한 지지 세력이자 안식처일 테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끊을 수 없는 고리, 폭력이 무마되는 폐쇄적 공간이기도 한.

 

  울며 맨발로 집을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

  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옛집 마당에 꽃피다」 중에서


  이 시에도 ‘폭력의 아버지’와 ‘눈물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울며 맨발로 뛰쳐나왔던 옛집, 한동안 비어있던 옛집에 새로운 이가 깃들어 마당에 텃밭을 가꾸며 살고 있다. 지천에 핀 온갖 꽃들을 바라보며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미는 듯한 느낌을 받는 화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유채꽃과 고추꽃, 깨꽃과 메밀꽃이 울음꽃을 대신하기까지, 화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유년의 기억에 붙들려 살아야 했을까. 슬며시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보는 화자에게서 화해와 용서, 치유의 희망을 엿보았으나, 글쎄, 마냥 훈훈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흐르는 세월을 핑계 삼아 묻고 덮느라 미처 치유되지 못한 일말의 상처는 끝내 남을 것이기에. 「그늘」 속 한 구절처럼 ‘말갛고도 흰 그늘’은 쉬이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처음엔 저 모래알들도 굵은 자갈들처럼

  서로 부딪치며 자갈자갈 울었을 것이다

  그 자갈들 거친 파도에 닳고 닳아서

  울음을 제 속에 희미하게 감추었을 것이다


  저 울음 속에 감추어진

  소멸한 시간의 내력을 종일토록 읽는다

                                                          -「시간의 무덤」 중에서


  벗어나기 힘든 그늘의 깊이는 닳고 닳는 일, 울음을 감추는 일을 부지불식간 당연한 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삭이느라 내뱉지 못한 진심, 채 터져 나오지 못한 울음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시간의 흰 뼈들’을 날라 무덤을 지었다. ‘머잖아 너의 시간도 닳고 닿아서/ 저 모래 한 알처럼 바람에 불려갈 것’이라는 구절이 처연하게 담담했다. 얼핏 또 한편의 시가 떠올랐다.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 살아가는 한 부부의 이야기, 이는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 번쯤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김광규, 「조개의 깊이」 중에서


  「조개의 깊이」와 『그늘의 깊이』라. 입 다문 조개와 오래된 그늘에서 느껴지는 부동성이랄까, 완고함 같은 것이 공교하게 통해 있다. 깊이를 모르고 침잠한 환멸과 슬픔이 아득한 곳에서 쌓이고 굳어져 또 다른 깊이를 만드는 동안, 우둔하게도 ―혹은 미련곰탱이 같게도― 우리는 같은 길을 되밟으며 마치 처음이라는 듯 지금을 사는 것일지도. 이유 없이 기시감이 드는 것은 나의 오늘도 결국 되풀이된 과거이기 때문일까. 나와 시인과 그들의 그늘이 별반 다르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귓속말을 엿듣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