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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Feb 24. 2023

옷이 되기를 거부하는 옷감처럼

조말선의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를 읽고



  이 옷감은 가능해서 따뜻하다 울 수 있는 가능성과 울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사이에서 팔 한쪽을 잘라낸다면 나를 다 감싸안을 수 있다 이 옷감은 옷이 되지 않아서 가능하다 추위를 막을 가능성과 추위를 못 막을 가능성 사이에서 다리 한쪽을 잘라낸다면 나는 폭 안길 것이다 이 옷감은 감수성처럼 마무리하지도 않고 퍼져나가기 때문에 불성실하다 따뜻한 옷이 되는 순간 육체가 느끼는 감정에 무책임하다 감수성은 형태를 잡지 않은 옷감처럼 어떤 가능성이다 U자로 드러나거나 V로 드러나는 목선을 결정할 때, 허벅지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치맛단을 결정할 때 감수성은 무한하다 감수성은 용서받는 감정이다 이 옷감은 결정되지 않아서 차가울 수 있다

                                                                                                                              -「감수성」



  옷감이 옷이 되지 못한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인가, 하고 쉬이 여길 테지만, 이 시는 그 기대를 천연히 뒤집는다. 되레 옷이 되지 않은 옷감만이 따뜻할 수도(혹은 차가울 수도), 나를 감싸안거나 폭 안을 수도, 육체가 느끼는 감정에 무책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형태를 잡지 않은 옷감’과 ‘무한한 감수성’, 그리고 ‘용서받는 감정’은 시 안에서 서로 단단히 얽혀 있다. 이쯤에서 문득,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었더라. 사전을 뒤적여 본다.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이라….


  김영민의 『공부론』이라는 책에서는 ‘공부’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 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 가는 일’. 덧붙여 ‘평생, 그리고 언제 어디서라도 그 무엇이든 자신의 한 가지 버릇을 바꾸고 있어야 한다’고 일침한다. 무릇, 형태를 잡아버린 한 벌의 옷이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옷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게 바로 공부하는 삶, 깨어 있는 삶, 자극에 민감한 삶, 감수성이 풍부한 삶인 걸까.


  ‘마무리하지도 않고 퍼져나가기 때문에 불성실하다’는 구절에 한참 시선이 머문다. ‘불성실’이라 하여 무턱대고 나쁜 의미는 아닐 테다. 무엇을 위한 성실이냐에 따라, 때로는 불성실이 더 나은 방편일 수 있으니까. 맹목적인 성실만큼 위태롭고 비극적인 것도 없다. 예사롭게 결론짓고 한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보다야 유연하게 굽이치는 삶이 용서에도 후할 것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떤 처지에도 놓일 수 있으며, 매 순간 타자에게 빚지고 있음을 자각하는 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므로. ‘감수성은 용서받는 감정’이라 했듯이, 산다는 건 내내 용서를 구하는 일일지도.


  문득 아이들에게도 이 시를 읽어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게 대체 뭔 말이냐,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겠지만.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로서 해야 하는 일에 관해 깊이 회의한 적이 있었다.(사실 매 순간 회의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호기는 사실, 진즉에 버렸다.(그래야 덜 기대하고 덜 실망한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적어도 아이들의 감수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정도는 해야겠다는 생각. 타자가 내 삶에 얼마나 깊고 크게 관여하는지를 알고 나면 세계에 대한 민감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물론 그 역도 가능하다. )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것, 다르고 낯선 존재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고 헤아리려는 노력, 이를 테면 상상력, 포용력 같은 것들도 결국 그 출발점은 감수성이어야 했다. 아무 때고 슬그머니 이 시를 들이밀어 볼까. 물론 어렵겠지만, 좋은 서두가 될 것 같은 느낌.


  「감수성」 외에도 기억에 남는 시들이 꽤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을 덧붙여 본다.

  「야간조」라는 시는 ‘멜버른보다 먼 밤’에 일하고 있는, ‘서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서로 보이지 않아서 혼자 잘할 수 있었’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노동만 보이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화자의 시선과 언어가 어쩐지 먹먹하다.

  「면적과 공간」에서는 연못의 주위를 빙 둘러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의 동선에서 사람간의 관계―마치 가운데가 텅 빈 관계―를 연상하고, 그러한 관계 방식의 반복과 중첩은 ‘목소리’가 소거된 ‘거대한 지름’, 언젠가는 연못의 목이 조여들고 말리라는 상상으로 이어진다. 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인식의 확장이다.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 한끗 차이면서 동시에 천지 차이인 두 존재에 대한 발상이 매우 흥미롭다. ‘한 사람은 닦아주는 자일 때 한 사람은 바닥이 되는 자’, ‘한 사람은 고개를 돌리는 자 한 사람은 온몸을 기울이는 자’, ‘한 사람은 돌아서서 지평선을 향해 다시 걷는 자 한 사람은 지평선을 밀고 당기고 빨고 거품을 내는 자’, 뭐 이런 식이다. 그 밖의 구절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마음에 들었다.(나름대로 이해했다고 판단한 구절만 나열해본 셈.)


  시집 제목이 말해주듯, 사실 이 시집은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를 쓰고 행간을 읽어 보려는 노력이 무시로 내쳐지는 느낌. 이해하려 해도 이해하기 힘들 테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고, 더 나아가 즐겨봄이 어떠냐고 능청을 부리는 듯했다. 되는대로 읽었다. 여백은 여백대로 물음은 물음대로 남겨둔 채. 필연으로 촘촘히 짜인 언어 역시 때론 갑갑하지 않은가. 마치 옷이 되어버린 옷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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