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읽고
기형도 시인 하면, 밤늦게까지 홀로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열무 팔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소년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다. 유년 시절의 가난과 상처는 그의 생애와 시적 세계 전반을 지배했고, 부정과 허무는 그를 표상하는 단어쯤으로 여겨왔다. 이곳저곳에서 이미 마주했던 시들이 더러 있었으나, 시집 한 권을 통으로 소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읽는 내내 머뭇거림과 재독의 연속이었다. 구절구절에 담긴 정서와 사유의 깊이가 심원한 탓에 도무지 가뿐할 도리가 없었던 것.
그는 「오래된 서적」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어서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고.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므로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고. 서늘한 자조의 시선에 등골이 오싹할 지경. 익히 알려진 시, 「질투는 나의 힘」 속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구절 역시 매한가지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는 그의 모습이 참담한 정물로 다가온다.
그러나 군데군데 꿈틀거리는 생의 감각이 일면 가슴을 쓸어내리게도 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로 시작하는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자신의 불안에 대한 선전포고처럼 느껴진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지금껏 자신을 짓눌러 온 불안마저 생의 일부로 담담히 받아들이는 느낌. 그리하여 내가 훌쩍 늙어버리더라도.
스물 아홉의 나이에 요절한 시인에게 ‘늙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노인들」이라는 시에서는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이 봄빛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속에서 화자는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느끼는데, 이는 그가 이미 훌쩍 늙어 버려서였을까. 채 오지 않은 날들의 슬픔마저 온전히 느끼는 사람이기에 그토록 삶이 고달팠는지도.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고 여겼기에, 섭리를 거스르며 아집으로 생에 매달리지 않기 위해 그렇게 일찍 떠나 버렸나.
「식목제」라는 시도 참 좋았다. ‘나는 없어질 듯 없어질 듯 생 속에 섞여들었네’라는 구절이 한참 시선을 붙든 것은 그 안에 담긴 절실함 때문이었다. ‘나는 일찍이 어느 곳에 나를 묻어두고/ 이다지 어지러운 이파리로만 날고 있는가/ 돌아보면 힘없는 추억들만을/ 이곳저곳 숨죽여 세워두었네’ 라고 하면서도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틔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식목제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입상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로 끝맺는 시적 흐름이 실로 간곡하다. 주어 없는 고통의 공허한 나열이 아니라 제 삶으로 고통을 통과해온 이만이 부를 수 있는 간절한 노래라는 생각.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꺼질 듯 이어지던 생이 단단한 격자무늬의 시를 낳은 셈이다.
김현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다. 과연 그의 시를 읽으면 현실을 직시하는 자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고통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안개」라는 시는 ‘안개의 성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 고장의 이야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안개가 명물이라니…. 여직공 하나가 겁탈을 당해도,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어도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닌 곳.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는 곳.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라는 구절에서 가슴이 덜컹했다. 사소하지 않은 사건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고, 모든 불행은 개인의 탓이 되고 마는 사회. 시야를 가리고 논점을 흐리는 ‘희고 딱딱한 액체’는 우리 모두가 지분을 갖고 있는 공공의 무엇이라는 것. 무심하지 못한 자에게는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상황과 타자가 많아질 수밖에.
「조치원」이라는 시는 열차에서 만난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에서 ‘분노’만을 배운 후 ‘진짜’ 낙향을 결심하고 조치원으로 향하는 사내. 몹쓸 꿈들이 빵봉지 몇 개로 뒹굴고, 의심 많은 눈빛, 좀더 편안한 생을 차지하기 위한 뒤척임으로 가득한 열차 속에서 화자는 사내와 대화를 나눈다. 조치원역에서 내린 사내를 묘사한 구절, ‘나는 그때 크고 검은 한 마리 새를 본다. 틀림없이/ 사내는 땅 위를 천천히 날고 있다.’ 순간 울컥하여 한참을 그 구절에 머물러 있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도 같은 종류의 시선이 깔려있다. 눈이 퍼붓던 밤, 한 관공서 유리창 너머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하고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을 떠나지 못하는 화자.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그 사내를 다시 떠올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낮은 자들의 연대가 아니라면 이를 어찌 설명할까.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에 나오는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것도 먼지 낀 인생의 푸른 바탕을 알아채는 자는, 제가 가진 안개의 주식에 괴로워할 줄 아는 자일 것이므로.
시인이 남긴 시작(詩作) 메모로 글을 맺는다. 그가 남긴 시들도 영원히 살아남아 도처에 눈물로 스밀 것이므로.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