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빗 콜의 『내 멋대로 공주』읽고
나는 공주 이야기를 좋아한다. 아, 물론 예쁘고 착하고 힘없는 공주가 용감한 왕자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식으로 끝나는 식상하고 빤한 공주 이야기 말고. 배빗 콜의 『내 멋대로 공주』는 그야말로 내 취향. 제목부터 멋지지 않나. ‘내 멋대로’라니. 그거야말로 내가 지향하는 삶인데.
내 멋대로 공주는 일단 복장부터가 심상찮다. 드레스는커녕 점프 수트 타입의 청바지에다 알록달록한 티셔츠, 빨간 색 단화가 기본 차림새다. 뚱뚱한 드래곤, 커다란 달팽이, 쥐와 고슴도치 비슷한 생물체가 공주의 애완동물(요즘은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책에 기재된 표현을 그대로 따랐다)들인데, 그녀는 그들과 함께 성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런 그녀에게 왕비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너도 이제 나이가 꽉 찼으니 짐승들하고 그만 노닥거리고 어서 남편감이나 찾아라!” 한 손엔 지푸라기가 묻은 농기구를 들고, 진흙투성이의 작업복 차림을 한 공주가 잔뜩 화난 얼굴로 왕비를 노려본다. 그런 모습에도 공주의 미모는 가릴 길이 없고, 결정적으로 그녀가(사실은 그의 부모가) 워낙 부자인 탓에 청혼자들이 끊이지 않는 상황. 공주가 선포하듯 말한다. “내가 시키는 일을 척척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결혼하겠어요.”
이미 예상한 바, 공주가 낸 미션이란 게 정말이지 어마무시하다. 민달팽이가 정원을 망치지 못하게 하기(거대한 체구에 꽃을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민달팽이는 괴수에 가깝다…), 공주가 아끼는 동물들에게 먹이 주기(이들 역시 괴수라고 할밖에…), 롤러스케이트 신고 누가 더 오래 춤추나 공주와 시합하기(공주의 무한 체력에 파랗게 질려 나가떨어진 왕자라니…),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 구하기(탑 전체가 유리라 기어오르기 힘들다는 게 함정…), 금붕어 연못에 빠진 요술 반지 꺼내 오기(요술 반지는 이미 연못 괴물의 입 속으로...) 등등. 이때 눈여겨 볼 것이 바로 왕자들의 이름인데, 이름에서부터 그들의 실패는 명약관화다. 허둥지둥 왕자, 엉거주춤 왕자, 와덜덜덜 왕자, 어질띵띵 왕자, 어설프네 왕자, 허푸허푸 왕자, 그 외 다수. 옮긴이 선생님, 센스가 넘치십니다.
바로 그때 뺀질이 왕자가 등장한다. 뭔가 불길하다. 역시나 이름 그대로 교묘한 편법을 사용하여 공주의 미션을 차근차근 수행해 나간다. 이를 테면, 민달팽이에게 술을 먹여서 알딸딸한 상태로 만들거나 헬리콥터로 애완동물들에게 먹이를 뿌린다거나, 의외로 공주를 능가하는 미친 체력의 소유자였다거나(약이라도 먹은 게 아닐까?). ‘뚫어뻥’을 사용하여 유리벽을 기어오르고, 칼집을 이용해 연못 괴물의 입을 벌려놓은 채 유유히 요술 반지를 꺼내기도 한다. 결국 공주는 하는 수 없이(?) 왕자에게 마법의 뽀뽀를 하게 되는데, 아뿔싸, 왕자가 돌연 엄청나게 커다랗고 울퉁불퉁한 두꺼비가 돼 버린다. 몹시 뿔난 얼굴로 휑하니 성을 떠나 버리는 뺀질이 왕자. 그의 소문을 들은 다른 왕자들은 아무도 내 멋대로 공주와 결혼하겠다고 나서지 않게 되었고, 그 뒤로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결론이다.
어쩐지 통쾌하다. 비리비리한 왕자들이나 약삭빠른 왕자나 어느 하나 신랑감으로 탐탁지 않은 건 당연하기에.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내 멋대로 공주에게 우선적으로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고 마법 능력치까지 갖춘 공주가 뭐 하러 결혼 제도에 갇힌단 말인가. 모자란 사내들이 물러간 후, 마침내 완벽한 왕자가 짠! 하고 나타나 공주의 생각을 돌리고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는 결말보다 이게 훨씬 더 통쾌하고 재미있었다.
얼마 전, 주간지 <시사IN>에서 다룬 특집기사 「우리 결혼 안 합니다―2023 연애·결혼 리포트」(808호/ 2023.3.14.자)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2022년 합계출산율 0.78명’(23.02.22. 통계청 발표)을 화두로 <시사IN>과 한국리서치가 공동 기획한 기사였다. OECD 가입국 중 합계출산율이 1명 밑으로 떨어진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는데, 사실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출산은 결국 연애와 결혼에 이은 생애 모델의 한 과정이므로, 이를 추적하기 위해 결혼 관련 설문 조사부터 다루고 있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별과 세대를 기준으로 결혼과 출산에 대해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이들은 바로 20대 여성이었다. 이들이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는 ‘개인의 행복’과 ‘사회적 성취’였고, 결혼―출산이라는 생애 모델과 사회적 성취의 양립은 어렵다고 여기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혼으로 획득할 수 있는 유무형의 이익보다 개인이 포기해야 하는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드러낸 셈. 경쟁사회, 사회적 불안정 등으로 인한 피로감 속에서 결혼은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이 돼 버렸고, 이로 인해 위험 회피 성향도 강해진 것이라는 지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기사에서는 결혼 의향과 강한 상관관계를 보이는 요소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했다. 주관적 계층 인식(실질적인 경제적 풍요도가 아니라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의 계층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관한 문제), 경쟁에 대한 피로감, 마지막으로 부모의 결혼 생활에 대한 생애 경험. 특히 여성은 세 번째 항목에서 자신이 겪은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대한 반감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소위 “나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라는 태세랄까.
물론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적 화두를 외국작가의 그림책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멋대로 공주는 왜 결혼하지 않으려 했을까? 그 어려운 미션들을 모두 통과한 왕자가 나타났는데도 공주는 기뻐하긴커녕 부루퉁할 뿐이다. 물론 그가 온갖 꼼수를 부려 미션을 수행한 것이므로 인성 면에서 낙제점을 준다 하더라도,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이 있는 법인데 마법의 뽀뽀를 무기 삼아 왕자에게 저주(?)까지 내리다니. 애당초 공주는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결혼을 무산시킬 목적으로 수행 가능성이 희박한 미션들만 제시한 셈인데, 예상 밖의 성공자가 나타나 공주를 당황시킨 거다. 이 상황에 그녀가 내린 결단은 자신에 대한 평판에 큰 오점이 남더라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결혼만은 피해가자는 거였을 테고.
공주인 그녀가 경제력에 대한 걱정 또는 낮은 계층 의식, 경쟁에 대한 피로감을 느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하나. 결혼제도 안에서 여성이 가지는 위치와 영향력의 한계를 여실히 알고 있었던 것. 바로 자신의 부모인 왕과 왕비를 통해. 이야기 속 배경과 역사적 지식을 동원해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국가 간 동맹을 통한 세력과 부의 확장 과정에서 수단화 되어버린 결혼이래서야 무슨 낭만과 자유가 있으랴. 예나 지금이나, 가상이나 현실이나, 지위가 높거나 낮으나 간에 결혼은 갖가지 제약을 수반하는 제도인 듯.
누군가는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는 이들을 ‘이기적’이라고 싸잡아 비난한다. 마치 손해 보지 않겠다, 희생하지 않겠다, 책임지지 않겠다는 심보가 그들 선택의 핵심 이유인 양 들먹이며. 하지만 이런 말도 있지 않나. 결혼이고 출산이고 뭘 모를 때 해야 한다고. 이 말인즉슨 미주알고주알 그 실체를 다 알고 나면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을 확률이 더 높다는 얘기다. 결국 경험자들은 다 알고 있다는 거다. 결혼—출산이라는 단계적 스텝이 한 개인의 인생을 얼마나 맹렬하게 뒤흔드는지를. 특히 여성에게는 큰 리스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도 늘어놓는다. 옛날엔 단칸방에서도 살림 차렸다고. 돈보다는 둘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돈 없어도 아이 낳고 잘 살았다고. 그러나 그렇게 준비의 여부가 사회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시절에 형성된 가족은 대개 어느 한쪽(주로 여성)이 개인의 성취를 희생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니 그런 가정을 청소년기에 겪었던 지금의 2030은 부모와는 다른 생을 살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조언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출산에 대한 낭만적인 포장 역시 심심찮게 마주한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평생 해볼 수 있는 일 중 ‘가장 깊고 가치 있는 경험’이라는 거다. “애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와 같은 말도 있지 않나. 그야말로 자의적인 해석이다. 깊은 경험 혹은 인격적 성숙의 경로를 지극히 축소하는 편협한 시각이자, 인생의 가치에 우열을 두는 교만의 말이다. 자식을 여럿 두어도 미욱하고 한심한 사람이 ‘천지 삐까리’고, 가족 이기주의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고 빈부 격차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마당에.
언젠가부터 결혼한다는 이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됐다. 무릇 축하란 한 점 의심 없이 온 마음을 다해 기쁘게 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결혼이라는 게 정말로 축하만 할 일인가. 게다가 결혼 제도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많은 이들을 소외시키는 것 같은 찝찝함이 들기도 했다. 결혼 생활은 끝없는 노력의 연속이어야 하고, 때때로 후회하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며, 아이라도 낳는다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나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 사랑을 지키는 방법으로 용감하게도 결혼이란 걸 결심한 것이니, 같은 선택을 앞서 한 사람으로서 ‘응원한다’는 말이 보다 진심에 가깝게 느껴졌다. 당신의 선택이 정녕 결혼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는 수밖에.
결혼 전, 동료 선생님으로부터 결혼 제도에 대한 회의가 섞인 넋두리를 여러 번 들었으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외면했다기보다는 실감하지 못했다. 경제력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하리라는 희망이나 기대 따위는 1도 없었으므로…), 경쟁 사회에 대한 피로감이 낮았던 것도 아니며, 내가 보고 자라온 부모의 결혼 생활이 순탄했던 것만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다르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당장 내 옆을 지키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신뢰만 가지고 선택에 따르는 변화 일체를 조목조목 예상치 못했던, 말 그대로 뭘 잘 모르던 시절이었으므로.
‘결혼은 행복, 육아는 보람’이라는 유의 어설픈 포장과 위선적인 과시로 비혼자와 딩크족을 생애 과업을 채 수행하지 못한 사람 취급하거나, 생애 계획 수립 단계의 청년들을 기만하고 싶지는 않다. 결혼은 관계의 확장인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새로운 차원의 기쁨인 동시에 불안을 견디고 불안에 익숙해지는 일임을 허심탄회하게 공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걷겠다면, 진부한 축하 대신 진심 어린 응원을 전해야지. 유경험자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내 멋대로 공주의 선택과 삶을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 지금처럼 살거나 추후에라도 정말 멋진 왕자―아니, 꼭 왕자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를 만나 슬기로운 결혼 생활을 해나가거나, 기대와 확신을 갖고 결혼을 했더라도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 강단 있게 이혼도 할 수 있기를. 결혼이 마냥 축하할 일만도 아니듯이 이혼도 마냥 피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고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무엇을 선택하든 어떻게 살아가든 공주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만은 내내 보장되기를. ‘내 멋대로’가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만의 멋’을 훼손당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고 가꿀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