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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Oct 26. 2020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그곳,

Part 1. 레벨 1의 여행자

어두운 밤, 랑과 나는 몸집만 한 배낭을 메고 도로변을 서성였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면 릭샤를 타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어서 릭샤는커녕 움직이는 거라곤 가로등에 드리운 우리의 그림자뿐인 듯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릭샤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 릭샤를 놓치면 다음은 없을 것이다. 양팔을 휘저어 릭샤를 불러 세웠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려고 할 때, 뒤에서 우리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커플이 뛰어왔다.

“너희 어디로 가?”

“우린 OO정류장으로 가.”

“우리도 거기로 가야 하는데! 너희만 괜찮으면 릭샤를 같이 타고 가도 될까?”

고개를 돌려 릭샤를 봤다. 척 보기에도 배낭 두 개와 사람 두 명도 간신히 탈법한 크기였다.

“우리는 괜찮은데… 이 릭샤에 다 탈 수 있을까?”

네 명 다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다른 릭샤를 기다리는 건 무리였다. 우리 넷은 한번 해보자며 릭샤에 배낭을 욱여넣었다. 릭샤는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공간만 남았고 타야 할 사람은 넷이었다. 우리는 배낭을 넣을 때처럼 몸을 꾸겨 넣었다. 랑과 나는 어깨를 좁혀 앉았고 그 커플은 한 사람 무릎 위에 다른 한 명이 앉았다. 기사는 시동을 걸었고, 릭샤는 불안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릭샤는 인도에서 택시 같은 역할을 했지만, 승용차처럼 든든한 문짝이 달려있진 않았다. 우리는 도로에 나뒹굴지 않으려 눈앞에 보이는 아무거나 붙잡았다. 어찌 됐든 릭샤는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이런 꼴이 우스우면서도 놀라웠다. 기네스북에 도전하고 성공한 사람처럼 이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고 말하자, 찌그러져 있던 남자애가 씩 웃으며 말했다.


“Everything is possible in India! (인도에선 무엇이든 가능하지!)"


3월의 어느 날, 나는 인도의 작은 이발소에 앉아 머리가 밀리길 기다리고 있다. 평생 벼르고 벼르던 삭발을 하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삭발을 한 두 명의 여성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한 명은 삭발했다는 이유로 일하던 식당에서 별안간 해고되었고 다른 한 명은 지나가던 남자에게 심한 욕을 들었다. 뉴스에서는 머리가 짧고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라는 이유로 폭행당한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발소는 출입문 따위 없이 뻥 뚫려있었다. 내부는 이발사 한 명만 서 있을 수 있었다. 면도크림을 얼굴에 잔뜩 묻힌 백발의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이발사의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이발사가 할아버지의 턱에 묻은 면도크림을 닦아내자, 각 잡힌 구레나룻과 깔끔한 턱이 드러났다.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발사에게 돈을 주고 길가로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I want to shave my hair. (머리 밀러 왔어요.)”


여자애가 무슨 삭발이냐는 꾸중을 들을까 긴장했지만, 안 그런 척 당당히 머리를 밀어달라고 했다. 머리를 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나 손님을 홀리는 말재주를 가진 것일까. 생애 첫 삭발을 앞두고 경직된 나에게 이발사는 흐르듯 말을 걸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하누만이었다. 하누만은 원숭이 신으로 인도에서 세 번째로 잘 나가는 신이다. 신의 이름으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 이름이 성 예수, 성 싯다르타였다면...

준비를 마친 하누만 씨가 어떤 길이로 자르겠냐 물었다. 그의 손에는 바리깡이 들려있었다.


오래전 동네 미용실에서 만난 미용사를 기억한다. 귓불 근처까지 머리를 잘라 달라고 말하자,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묻듯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그 미용사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모양새로 잘라 놓았다.


하누만 씨는 싱글벙글 웃으며 머리카락을 밀기 시작했다. 윙윙 소리를 내는 바리깡이 정수리 위를 신나게 오고 갔다. 열 번의 염색과 탈색을 버텨낸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졌다. 영상을 찍던 랑은 기분이 묘하다며 울먹였다. 쟤도 참, 자기 머리 미는 것도 아니면서….

그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머리털을 밀 때 마음은 같은 털인데도 겨드랑이 털이나 다리털을 미는 순간과 달랐다. 중요한 무기를 잃는 사람 같아 애처로운 마음이었나. 하지만 최후의 결전을 앞둔 전사처럼 비장해지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주신 하누만 씨에게 200루피, 한화로 3천 원인 가격을 지불하고 이발소를 나왔다.

바람이 휭 불었다. 눈앞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 없었다. 손으로 머리를 넘기지 않아도 되었다. 왜냐하면, 내 머리카락은 1센티였으니까.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한 번 더 긴장했다.

‘친구들이 놀라 뒤로 자빠지면 어쩌지. 빡빡머리 여자애랑은 친구 안 해주면 어떡하지!’

괜히 잡히지도 않는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호스텔에 들어섰다.


“와! 너 머리 잘랐구나!”


친구들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몇 개의 손이 내 머리를 쓸고 갔다.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빼먹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용기가 없어 인도에 와서야 머리를 밀었다고 말하자, 프랑스에서 온 멜리나는 웃으며 말했다.


“Everything is possible in India!”


©성지윤

머리를 민 도시는 푸시카르였다. 그곳은 인도 속 또 다른 세계 같았다. 거리에는 얼굴이 허옇고 머리 색이 밝은 이들이 많았다. 가게의 간판에도 여러 개의 언어로 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중엔 처음 보는 글자의 조합도 있었다. 한자 같기도, 상용구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그 글자가 이스라엘의 언어라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간판에 새겨진 언어만큼 사람들의 차림새도 다양했다. 귀에 오백 원 동전만 한 피어싱을 한 사람, 앞 머리와 몇 군데만 남기고 싹 민 머리를 한 사람. 일명 '드레드락'이라고 부르는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은 두 걸음에 한 명씩 만났다. 얼기설기 이어진 천을 입은 사람, 엉덩이가 겨우 가려진 청반바지를 입은 사람. 다른 도시에서는 가리기 급급했으나 이곳의 사람들은 별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았다.


나와 랑은 묵을 숙소를 찾다가 우연히 P호스텔을 발견했다. 무엇이든 가능한 세계를 맛 본 건 그 호스텔에서였다.

호스텔의 대문을 지나는 순간, 작은 마을에 들어온 듯했다. 호스텔 가운데에는 모래로 된 마당이 있었고 한쪽에 손님을 맞이하는 리셉션이 있었다. 리셉션에 있던 큰 스피커 두 대에서는 낮이나 밤이나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도 명상음악부터 팝송, 힙합까지 다양했다. 그곳에서는 모두 맨발로 돌아다녔다. 어떤 애는 발바닥이 이미 굳은살로 단단해져 있었다.


아침 9시였지만 해는 정오에 뜨는 해처럼 뜨거웠다. 그나마 드리워진 그늘에 요가 매트를 깔고 윌로우를 기다렸다.

윌로우는 영국에서 온 친구였는데 오랫동안 인도를 여행하는 중이랬다. 오늘의 요가 수련은 윌로우가 이끌어 갈 참이었다. 윌로우는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와 자신의 요가 매트를 들고 유유히 나타났다.

푸른 눈과 금발 머리,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와 살짝 보이는 앞니가 매력적인 친구였다. 윌로우의 목선을 따라가다가, 검은 민소매 사이로 다부지게 자리 잡은 어깨 근육이 보였다. 요가 수업이 시작되고 윌로우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윌로우의 겨드랑이 사이로 금빛 털이 반짝였다. 머리가 금발인 애들은 겨드랑이 털도 금발이구나…. 아니,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은 여자를 만나다니!


머리카락은 미는 것에 용기를 가져야 했다면 겨드랑이 털은 밀지 않을 때 용기를 가져야 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여자들은 털 한 가닥도 없이 모두 깔끔한 겨드랑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차성징을 지나고 겨드랑이 털이 자라난 이후로 나는 매번 면도기로 털을 깎았다. 면도기의 각도가 살짝이라도 틀어지면 핏물이 찍 나왔다. 하필이면 예민하고 여린 겨드랑이 부위는 작은 상처에도 따갑게 나를 괴롭혔다. 여름철이면 민둥 한 겨드랑이에서 땀이 더 나는 탓에 팔을 들어 올려 자주 바람을 쐬어줘야 했다. 그럼에도 꿋꿋이 겨드랑이 털을 밀었다. 여자라면 자고로 매끈한 겨드랑이를 가져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제모의 빈도수를 줄인 건 십 대 후반부터였다. 그저 몸을 있는 그대로 두고 싶었다. 몸을 있는 그대로 두는 일. 그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브라를 입지 않고 영어학원에 간 날, 한 남자는 나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눈은 자꾸 내 턱 밑을 향했다. 그 시선이 따가웠지만 꾹 참고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브라를 입지 않고 영어학원에 갔다. 마찬가지로 겨드랑이 털이 거뭇거뭇 자라나도 민소매 티를 입고 요가원에 갔다.


'혁명은 언제나 자유에 관한 것'이라고 체코의 철학자는 말했다. 따가운 시선을 견뎌가면서까지 브라를 입지 않았던 건 이 행동이 나에게 ‘조용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몸을 편하게 하는 일에 용기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하고 있으니 너도 할 수 있다고, 우리 같이 해보자고 말하는 몸짓이었다.


그곳에선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유두의 모양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벗고 싶은 만큼 벗었다. 한국에서 ‘조용한 혁명’이라고 여겼던 것이 그곳에선 철 지난 이야기 같았다. 내친김에 코에 피어싱도 하고 타투이스트인 친구가 진행하는 핸드 포크 타투 워크숍에 들어가, 내 손으로 왼쪽 팔에 작은 타투를 새겼다. 비로소 내 몸의 주인은 나라는 걸 느낀 순간이었다.


“Everything is possible in India.”


인도를 여행하는 이에겐 마법주문과 같았다.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일이 그곳에선 가뿐하게 가능했다. 불가능하거나 아주 오래 걸릴 난제라고 생각했던 나의 몸을 내 뜻대로 다루는 일을 그곳에서 하루 만에 해냈다.


그때의 홀가분함, 을 몸은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오늘도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고 요가원에 간다.


©성지윤


글,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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