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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일걸즈 Nov 05. 2020

마담, 셀피?

Part 1. 레벨 1의 여행자

모든 건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었다. 아침에 숙소 문을 열고 나갈 때부터 저녁에 문을 닫고 들어올 때까지 걸음 한 번에 “셀피?”라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반짝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인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의 손에는 핸드폰이 고이 들려있었다.

관광객이 적은 거리로 나가면 여성의 옷자락조차 스칠 수 없었다. 버스, 택시, 릭샤를 운전하는 기사부터 채소 가게 주인, 동네 슈퍼 사장, 수레를 끄는 사람, 거리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들 모두가 남자뿐이었다. 여자가 사라진 거리에서 시선은 더 강렬해졌다. 온종일 하얗고 커다란 눈동자들이 주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밥을 먹을 때, 물을 마실 때, 릭샤를 잡을 때, 가만히 서 있을 때, 그들은 고개를 돌려서까지 우리를 쳐다봤다. 내 모든 움직임을 마이크로 단위로 기록하는 카메라가 달라붙은 것 같았다. 길을 걸을 때면 습관적으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더운 날씨인데도 한겨울 칼바람이 불 때처럼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매일 저녁 숙소로 돌아오면 어깻죽지가 욱신거렸다.


자이푸르에서는 델리에서 만났던 아눕(가명), 시드(가명)와 여행을 함께하기로 한 참이었다. 뭄바이에 사는 스물두 살의 아눕과 어릴 적 포르투갈에 이민을 간 시드는 사촌지간이었다. 우리 넷은 자이푸르 호스텔의 1일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로 했다. 릭샤를 빌려 도시 곳곳을 돌아보는 일종의 패키지 상품이었다. 평소의 루와 나 같았으면 이용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지만 새로운 동행자가 있을 때는 어떤 종류의 유연함이 필요했다.


나는 얇은 보라색 카디건을 입고 배낭을 메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가 따뜻하게 내려와, 자이푸르의 황토 건물들이 분홍빛으로 빛났다. 릭샤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을 달려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며 상아색의 옛 건물이 서서히 나타났다. 어딘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건물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마치 한국의 향교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걸으며 공간을 둘러보다 아눕에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가 어디라고?"

"무덤. 자이푸르에서 살았던 마하라자(인도의 귀족)의 무덤이래."

"마하라자? 어떤 마하라잔데?"

"그냥, 마하라자."

나는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인도에 많고 많은 마하라자 중에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니. 알지도 못하는 '그냥' 마하라자의 무덤을 오긴 왜 온담.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고 앞장서 걸어가는 아눕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이런 곳들이 언제 어떻게 생겨난 건지 아는 게 모두의 흥밋거리는 아닐 테니까.


무덤을 시작으로 우리는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저 궁전에서 이 궁전으로 정신없이 이동했다. 1일 투어 일정에 포함된 관광명소의 순서와 식당, 음식의 종류는 모두 아눕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는 우리 티켓을 힌디어로 대신 주문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우린 우리 몫의 돈만 매표소에 지불했다. 그 둘과 대화할 때 말고는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어떤 장소를 들렸다가 나오면 다음 목적지도 모른 채 릭샤를 타고 이동했다. 기사들은 잘 달리다가도 사진을 찍는 포인트에서 자꾸 릭샤를 멈춰 세웠다. 나는 달리는 차 안에서 보는 풍경이 더 좋을 뿐, 유명한 장소를 사진 찍는 건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눕은 괜찮다는 나를 굳이 끌어내려 명소들을 보게 했다. 예쁘지? 라고 묻는 그에게서 인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열의가 보였다. 그 열의가 어찌나 강했던지 되려 옆에 있는 내가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더구나 자이푸르는 셀카를 찍자며 다짜고짜 핸드폰을 우리 얼굴 앞으로 갖다 대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정신을 잠깐이라도 놓치면 우리를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걸음을 옮기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안 된다고 말하려는 찰나엔 아눕이 나를 가로막고 말했다.

“안돼요. 사진 찍고 싶으면 100루피 내시던가.”


©성지윤


아눕의 모든 행동은 여름철 파리처럼 귀찮았다. 나는 내가 직접 가고 싶은 장소를 고르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내 목소리로 티켓을 사고 싶었다. 그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도리어 숨 쉬듯 가뿐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여행자 대 여행자. 내가 원했던 그와 나의 관계였으나 그건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 부잣집 인도 남자애가 졸졸 끌고 다니는 희멀건 동양인 여자애가 되어, 내 옆을 오가는 인도 남자들의 휘파람을 감당해야 했다.


아눕의 거만함과 지나친 배려, 알아듣기 어려운 힌디 영어가 이리저리 뒤엉켰다. 아눕은 식당에서 메뉴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를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으면 약간의 신경질도 부렸다. 틱틱거리는 아눕이 짜증 나면서도 눈치가 보였다. 그의 어깨가 점점 떡하니 벌어졌다. 반면 나는 쭈글쭈글 쪼그라들었다. 오늘 하루 내 힘으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 감히 나를 이따위 쓸모없는 남자애의 ‘귀염둥이’로 대하다니. 거기다 싫다는 말 한마디 똑 부러지게 못 하는 나는 또 뭐람.

무력감이 내 발목을 붙잡고 땅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혹은 나를 제외한 이들이 전부 사라지거나.

노을을 보러 가겠다는 아눕과 시드를 뒤로하고 나와 루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는 릭샤 안에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있었다.

“유랑아아아….”

어느 순간 루가 꽉 막힌 목소리를 토하며 나를 불렀다. 루의 검은 버킷햇 밑으로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루를 쳐다보다, 그를 부둥켜안고 함께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기사가 릭샤를 멈춰 세웠다. 그는 허둥지둥 길가 짜이 가판대로 릭샤를 옮겼다. 그리고 우리에게 짜이를 한 잔씩 쥐여주며 아눕 일행과 헤어지게 되어 슬픈 거냐고 물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장르는 로맨스뿐인 것 같았다. 놀랍지도 않았다.

숙소 앞에 도착해 기사에게 약속된 교통비를 지불하려는데, 그가 대뜸 50루피를 깎아주겠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인형극 보면서 대마초 피울 수 있는 곳이 있는데, 같이 안 갈래? 너네한테만 특별히 얘기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야...”

릭샤 기사의 친절한 가면이 벗겨지고 음흉한 미소가 드러났다. 그가 데려가겠다는 곳이 어떨지는 뻔했다. 겁이 나는 대신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빠르게 몸을 순환하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퍼펫쇼라는 단어가 계속 귓가에 잉잉거리며 파장을 일으켰다. 이건 우리가 꿈꿔오던 인도가 아니었다.


푸시카르의 한 사원에 올랐을 때였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연속적인 셔터 소리가 코앞에서 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중년의 인도 남성이 겨우 1m 남짓 떨어진 거리에서 나를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저기요.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만 보며 셔터를 눌렀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초 단위로 쏟아졌다. 그는 내가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댔다.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손을 뻗어 얼굴을 가렸다. 사진을 찍고 싶지 않으니 당장 멈춰라,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당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긴 하느냐는 말을 ‘건넸다’. 막무가내로 쏟아지는 셔터 소리 앞에서 내 목소리는 차분하고 공손했다.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남자가 찬 번쩍이는 금시계가 보였다. 돈 많고 뚱뚱한 인도 남자는 나보다 힘이 셀 거야. 잘못 대들었다가는 한 대 맞을지도 몰라. 심장이 벌렁거리며 들끓는 분노가 곧장 뛰쳐나오지 못하고 주춤댔다.


금시계남이 꿈쩍도 하지 않자 나는 언성을 조금 더 높였다. 사원에 같이 오른 친구들이 나와 남자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친구 중 한 명이 멀찍이서 힌디어로 그를 제지했다. 그는 영국에 살고 있는 인도 남성 여행자였다. 사진을 찍던 금시계남은 그제야 핸드폰을 치웠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화면을 보여주며 사진을 삭제했다. 그리고 기분 나쁘다는 듯 툴툴대며 내 곁을 떠났다.

금시계남이 떠나고도 사원에 올라오는 인도 남성들은 하나같이 짜기라도 한 듯 셔터를 눌렀다. 자신의 핸드폰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며 히히히 웃었다.  사원에 있는 내내 몸은 한 덩어리의 용암이 되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어떨지는 뻔했다. 그때 한 친구가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에이, 너무 신경 쓰지 마.”

그의 이름은 세르게이였다. 세르게이는 나와 같은 호스텔에 묵고 있는 러시아 여행자였는데, 여행 경험이 많아 얘깃거리도 풍부했고 나와 말이 잘 통했다. 나는 그런 세르게이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고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날 신경 쓰지 말라는 세르게이의 말은 전혀 도움이나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화를 삭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쟤네가 저렇게 찍어간 사진이 어디에 쓰이는지 너도 들어서 알잖아!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적어도 저런 행동이 얼마나 무례하고 잘못된 건지는 알려줘야지.”

그러자 세르게이가 너그러이 웃으며 말했다.

“알지. 다 아는데, 어쨌든 예민하게 굴면 너만 피곤하잖아.”


세르게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모두 알고 있었다. 델리에 도착한 첫날부터 그들의 휴대폰 렌즈가 내게 향하는 것을. 그들이 통화하는 척을 하며 내 영상을 찍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찍힌 사진과 영상이 그들의 페이스북에 올라가고 때때로 정체 모를 웹사이트에 공유되기도 한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사원을 떠나고 푸시카르를 떠나고 아그라, 바라나시, 다른 도시들로 여행지를 옮겨도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진을 찍지 말라는 내 앞에서 도리어 거절의 이유를 물었다. 당당한 눈빛에는 자신에게 그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굳건한 믿음이 보였다. 음흉한 셔터 소리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들의 코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한탕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이고 싶었다. 동시에 나는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여행이 즐겁길 바랐다. 모르는 척하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 편이 아무도 없는 곳은 너무 아득하고 무서웠다.


어렸을 때 나는 무대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 무대에 오르면 그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학예회에서 원더걸스의 ‘Tell me’를 추기도 했다.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손을 위로 콕콕 찌르며 춤을 추었다. 엄마 아빠는 떨지도 않고 무대를 누비는 나를 보고 연예인이 될 줄 알았다고 했다.

인도에서는 하루 12시간을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쉬는 시간도 없이 1인극을 하는 꼴이었다. 재밌는 연극일 리는 만무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내 먹고 마시고 걷기만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집중했다. 무대에 올랐던 첫 순간은 신선했지만 며칠을 내리 그 위에 있는 건 절대 유쾌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움과 부담감을 넘어서 불쾌했다. 때때로 사람들의 눈빛에 식은땀이 났다. 나는 처음부터 그 무대에 오르는 걸 원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노란색 스타킹을 신을 때를 제외하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에 이렇게 많고 무례하고 적나라한 시선을 받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동양인치고 흰 피부는 인도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고, 19년 동안 사랑해준 적 없는 숱 많은 곱슬머리는 그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떤 날엔 한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마담, 유어 헤어 이즈 쏘 뷰티푸울….


우리는 자이푸르에서 다시는 릭샤를 타지 않았다. 돈을 두 배가량 더 내야 했지만 긴 거리를 이동할 땐 무조건 우버를 불렀다. 시내로 나가면 퍼펫쇼에 데려가겠다던 기사나 그의 동료들을 마주칠까 봐 무서워 미어캣처럼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릭샤 기사와 있었던 일은 자이푸르를 떠나고 나서야 호스텔 사장에게 고했다. 혹여 사장이 기사들과 한패일 경우 자칫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0루피면 숙소를 구할 수 있는 인도에서 최소 200루피 이상의 호스텔을 골랐다. 우리가 주로 선택했던 여성 전용 도미토리는 혼성 도미토리보다 더 비싼 값을 불렀다. 기차는 사람 손이 쉽게 닿을 수 없는 위층 좌석으로, 버스는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럭셔리한 차량으로 골랐다. 당연히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편하자고 돈을 더 내는 것과 안전을 위해 돈을 더 내는 건 달랐다. 안전을 위한 지불은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억울함과 서러움을 동반했다. 네팔에서 만난 중년의 한국 남자는 우리의 한 달 평균 여행비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우리를 초짜 여행자 취급하며 자신이 얼마나 저렴하게 여행을 해왔는지, 또 얼마나 노련하고 능숙한 여행자인지에 대해 나불거렸다. 나는 그의 주둥이를 철썩 때리고 싶었다.


아파서 식은땀이 흐르는 상황에도 릭샤나 우버를 탈 땐 기사가 안전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지 지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여 한국 대사관 번호는 핸드폰에 찍어둔 채였다. 당장 기절할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했을 때, 나는 곧장 길바닥에 속을 게워냈다.

인도 남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에게 남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럼 우리는 남편이 있다고 대답했다. 남편의 이름은 지성이었다가 수혁이었다가 민석이가 되었다. 인도에서 우리가 겪는 일은 남성 여행자에게는 보통 일어나지 않았다. 스위스 여행자 라오는 나와 함께 푸시카르 사원에서 금시계남을 맞닥뜨렸지만, 남자는 라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어보는 예의를 갖추었다. 라오가 싫다고 말했을 때 남자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 프랑스, 독일, 말레이시아 그 어느 곳에서 왔든 여성 여행자라면 모두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형편없는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길을 걷는데 나랑 자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는 놈을 만났어.”

“오늘 오토바이 운전하던 웬 미친놈이 엉덩이를 퍽 치고 지나가는 거야.”

“홀리 축제에서 누가 내 가슴을 만졌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새낀지도 모르겠어.”

쏟아지는 여성 여행자들의 간증은 책으로 묶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우린 모여 앉아 각자가 만났던 인도 남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쌍욕을 퍼부었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 여행자들과 나의 반응이 공통된 건 아니었다. 특히 백인 여성 여행자들은 기분은 나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퉤, 침 한 번 뱉고 말았다. 처음에는 전혀 떨지 않는 그들에게 경외심을 가졌지만, 이내 슬픔이 뒤따랐다. 내게 여행 중 벌어진 모든 일은 절대 침 한 번 뱉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나는 때때로 최악의 순간을 상상했으니까.


인도를 떠나고 동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여행지가 바뀌었다.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사라진 대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윙크를 남발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세르비아에는 능글거리며 술 한잔하자던 중년의 아저씨가 있었다. 호스텔에서 만난 네덜란드 여행자는 내 손을 덥석덥석 잘도 잡아댔다. 물론 그는 내 동의 따위 구한 적이 없었다. 로테르담 길거리의 뚱뚱한 남자는 “유 룩 쏘 섹시이”라는 말을 귓가에 속삭이고 지나갔고 베를린의 청년들은 길을 걷는 내게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나의 꼬리표는 ‘여성 여행자’에서 ‘동양인 여성 여행자’로 바뀌었다. 운이 좋은 때에만 단순한 ‘여행자’가 될 수 있었다.

상황이 나아진 건 없었다. 내가 더 담담하고 단단해졌을 뿐이었다. 크고 작은 일들에 생채기 난 가슴에는 딱쟁이가 앉았다. 말랑말랑했던 마음의 근육은 늘어나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다,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끈끈해졌다. 나는 모든 순간 최선을 다해 나를 지켰다.


꿈을 꾸었다. 그곳은 인도 같았으나 불가리아이기도 했으며 네덜란드와 비슷한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숙소에서 피우던 향냄새가 코끝에 아릿했다. 거리에는 색색깔 옷차림의 여성들이 걸어 다녔다. 사리를 입은 사람도 있었고 짧은 반바지와 끈나시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맞추며 은은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사람들은 여행자인 내게 진심을 담아 호의를 베풀었다. 나는 그들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기분 좋게 그 호의를 받아들였다. 아침이든 밤이든 성큼성큼 길을 걸었다. 큰 길이든 한적한 골목이든 뚜벅뚜벅 돌아다녔다. 어둠을 신경 쓰지 않고 거나하게 술에 취했다. 릭샤 안에서는 달콤한 낮잠을 즐겼다. 그리고 그리운 얼굴들과 모여 앉아 마음 놓고 깔깔대며 웃었다. 살기 좋은 세상이었다.

살고 싶은 세상이었다.


©성지윤
글 옥의진(유랑), 사진 성지윤(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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