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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이날 Aug 21. 2022

우리가 나눌 밥정

나는 평생 누구와 몇 그릇의 밥정을 나눌 수 있을까

 

<밥정> 故임지호 쉐프의 플레이팅

 

 <우리들의 블루스>나 <사랑의 불시착> 등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 외 따뜻한 정을 지닌 이웃들이 많이 등장한다. 극은 타지에서 우연히 유입된 새로운 인물과 현지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 반목과 화해 등을 영원한 적이 없는 세상에서 그려낸다. 그런 세상이란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고, 일이 그른데에는 개인의 어리석은 선택만이 있을 뿐인 곳이다. 악과 악, 선과 선, 악과 선은 맞서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는 서로가 훌룡한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마음으로 눈물을 훔치고 사는 '츤데레'이다. 어긋난 것은 각자가 처한 상황일 뿐. 


 나는 이런 <우......블>이나 <사......불>에서 그려지는 세상이 참으로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위안이 된다. 그럼에도 이웃간의 정이 곰실곰실 넘쳐나서 니집이 내집, 내집이 니집 되는 일은 뭔가 껄끄럽고 불편하다.혹여 옆집에 남의 일을 제 일처럼 여기는 김반장이 산다면 나는 마주치지 않기 위한 007작전을 매일 펼쳐야만 할 것 같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마주칠 때, 간단한 목례만할 뿐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버스나 슈퍼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말을 걸기도, 마냥 모른척 하기도 참 멋쩍은데, 그런 내 마음이 상대방의 얼굴에서도 포착이 된다. 그래서 불편하다. 조금 아는 것이 아예 모르는 것보다 더 불편하다.

 집 앞 슈퍼일지라도 점원분이 알은 체를 하면 나는 더 이상 그곳을 가지 않는다. 고객을 친절히 응대하는 마음으로 나의 needs를 물어보거나 내 아이가 몇 살인지, 학원은 어디를 다니는 지 파악해주길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  슈퍼에서 필요한 말은 "안녕히 가세요", "수고하세요" 이 두 마디면 충분할 것 같다. 


- 최대한 마주치지 않을 것

-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도 받지도 않을 것


 쓰고 보니 이 두 문장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참으로 무익한 노력을 하는 것 같다. 이웃과 인사를 하고 오늘의 날씨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지난 달 지나치게 부과된 관리비 내역에 대해 물어본다고 해서 그 밖의 의미가 오가는 건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닌데, 아무 일 같은 불편함. 불편함의 뿌리는 불안함이라고 하는 데, 그럼 나는 태생적 불안함을 지니고 태어났는가.


 故임지호 쉐프의 <밥정>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그는 열 다섯 살 나이에 가출을 해서 이 식당, 저 식당을 떠돌며 일을 배웠다고 한다. 돈을 주면 주는대로 안 주면 안 주는대로, 오랜 기간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며 음식을 만들었다. 유명 호텔의 쉐프로도 일을 하고 해외초청을 받아 요리 시연을 하기도 했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강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산나물, 들나물을 채취하고, 해녀에게서 얻은 생청각으로는 토향 가득한 청각초밥을 만들었다. 

 내가 태생적 불안함이 있다면 그는 태생적 그리움이 있는 사람같았다. 내가 어찌할 바 없어 단절된 생활에 편승했다면,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음식이라는 '정'으로 관계를 이어갔다. 부산스럽지도 가식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어느 지리산 자락 곱디고운 할머니에게 겨우내 드실 모과청을 만들어드렸다. 할머니의 웃음에서 그의 엄마를 찿는 것 같았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과 키워주신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투영된 음식같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그는 심장마비로 작고했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단순히 내게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죽기 1년 전의 기록으로 '함께 사는 일'에 대해 많은 일을 생각하게 됐다. 

 82분의 영화가 그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지라도, 나의 지향점은 응당 자연과 음식과 사람과 치대면서 사는 일이라고. 이웃과 마주치지 않기 위한 비루한 노력이 태도가 되고 삶이 되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말이다. 


 삶의 태도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갑자기 친근한 사람이 될 수는없다. 김반장은 더더구나 머나먼 나라의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눌 수 있는 밥정은 없을까, 나는 평생 몇 그릇의 밥을 '정'으로 나눌 수 있을까. 

 단절하고자 하면서도 인터넷으로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과 소통하려했던 노력이 애잔하다. '밥'이 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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