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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이모, 하기 싫어요

억울함도 성장한다 -가족은 나의 힘

by 연글연글




나는 1남 2녀 중 장녀이다.
막내아들인 남동생과는 7살 차이가 난다.
딸 둘은 비교적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려 나갔는데,
막내아들은 늦게까지 높은 단계의 공부를 하다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그리하여, 아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에 여동생네 막내 조카가 태어난 후로, 12년 만에 다시 아기의 존재가 등장했다.
그 조카 녀석은 울 집에서 거의 '소황제' 대접을 받으며, 모두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일요일만 되면 우리 딸들이 "쭈니 놀러 오라"라고 졸라대기 바빴고, 그렇게 모인 온 가족이 둘러앉아
순번 정해 돌아가며 안아보고 쪽쪽거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곤 했다.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엔, 기저귀 찬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이리저리로 어찌나 빨빨거렸던지, 딸들이 만보기를 배에다 채워놓고 기록을 재보기도 했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는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 라며 옆에 앉은 사람들 머리를 양손으로 끌어다 붙이는 바람에, 억지로 옆사람과 '앙드레 김 쇼 피날레' 포즈를 해야 하는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우리는 거의 주말마다 그 녀석을 보는 재미에 살면서
조카가 자라는 순간순간을 함께 쌓아갔다.
​어느덧 쭈니는 무럭무럭 자라 유치원 졸업식에서는 똑 부러지게 답사까지 해내며 멋지게 유치원을 졸업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큰딸은 대학 졸업반이 되자 취업 준비를 하면서, 빨리 취업해서 본인이 쭈니의 책가방을 사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녔다.

​취업 포부가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며 엄마의 빨간 내복을 사드리겠다는 것도 , 아빠의 지갑을 사드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슨 조카의 책가방을 사주고 싶은 거라니.

어이없게 우리 부부는 조카에게 완패당했다.

​암튼 말이 씨가 됐는지, 정말로 딸은 자기와 조카의 졸업을 몇 달 앞두고 덜컥 취직이 됐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짐이.

난 속으로 황당한 취업 목표에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는데.
사촌 동생에 대한 사랑이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져서 다행이다.
백화점에서 멋진 책가방을 사들고 온 딸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아, 꿈을 이룬 자는 행복하구나.

​그런 조카 녀석에게 여동생이 태어나면서, 그의 독보적인 인기는 자연스레 동생과 나뉘게 되었다.
가족들이 모일 때면 여동생 꼬맹이는 주로 울 남편이 맡아서 안고 다녔다.
넓은 품이 편하게 느껴졌는지 꼬맹이는 안기면 금세 잠들곤 했다.
그러면 남편은 슬쩍 웃으며

"떡 실신녀 등장하셨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했다.

​신기한 게 딸들이나 나는 워낙에 아기들을 좋아해서 지나가는 남의 집 아기들에게도 눈길이 자주 가는데
남편도 어느새 물이 들었는지 아기들을 예뻐하는 거다.


조카들이 놀러 오면, 우리는 먼저 안아보겠다고 차례로 줄을 선다.
그러면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던 남편이 슬쩍 끼어들어 아기를 새치기해 간다.
그러면 바른생활 성격의 작은 딸은 입이 댓 발 나오고,
큰딸은 포기하고 줄 뒤로 물러난다.

이런 해프닝의 시간 속에서,
어느덧 큰딸이 결혼을 했고, 시간이 더 흘러
우리 집에 또 한 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그동안 아기였던 조카들이, 이번에는 아기를 보러 집에 놀러 왔다.
고 작은 무릎 위에 아기를 올려 주었더니, 신기한 듯 시종일관 방긋방긋 웃기만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너희의 모습이 아기처럼 그러했는데.

인생은 참 빠르게도 돌고 도는구나.

​"쭌아, 민아! 너희 조카야.
쭈니는 삼촌이 되고, 민이는 이모가 됐네~"
우리가 알려주자, 처음엔 와닿지 않는 듯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특히나 초딩인 쭈니는 대수롭지 않게 '삼촌 콜'이었고 애기 볼을 한번 손으로 찍어보고
하품하는 입 모양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놀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민이가 갑자기 울먹이며 말하는 거다.

​"잉, 나는 이모 싫은데. 나도 언니 하고 싶다!"

​자기 눈에 훨씬 이모 같아 보이는 내 딸들은 자기한테 '언니'인데,
아기보다 고작 4살 많은 자기는, 이모가 된다는 게 생각할수록 억울했나 보다.

5살 이모님의 귀여운 절규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지만,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인생이란 게 참 묘하다.
누구에게나, 나이에 상관없이 억울한 구석은 있게 마련이구나.
겨우 5살 먹은 꼬마에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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