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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이 떠났다.

다시 걷는 육아의 길

by 연글연글



초등학교 시절,
주삿바늘 들고 들어온 보건 선생님의 예방 주사를
맞기 위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던 시간.

한 명씩 줄이 줄어들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숨이 가빠지는 시간이었다.

​차라리 따가운 바늘이 팔뚝을 찌르는 그 순간보다
내 차례가 다가오며 한 명, 또 한 명
내 앞에서 빠져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시간이
훨씬 더 무섭고, 더 괴로웠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다시 그때처럼 공포 앞에 줄을 선 시간을 보냈다.

손녀가 내 곁을 떠날 날이 다가오는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
그렇게 모래시계 앞에 선 채, 잔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버텼다.

​그동안 내 사랑들과 헤어질 때마다 늘 다른 사랑이 내 곁에 있었다.
큰딸이 떠날 땐 작은딸이 있었고,
작은딸이 떠날 땐 손녀가 내 곁에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별을 견뎌왔다.

​그런데 이번엔,
손녀가 떠나고 나면 이젠 정말 아무도 없다.
내 편이 없다.
남의 편 하나만 있을 뿐이다.

​과연,
이번 이별은 내가 견딜 수 있을까.

.

.

.

딸이 이민을 결정한 뒤로는,
손녀의 얼굴만 쳐다봐도 눈가가 자꾸 젖어들었다.

이 사랑스러운 얼굴을 이제는 자주 볼 수 없겠구나.
또랑또랑 “할미!” 부르며 달려오던 목소리도
이젠 머릿속에서만 다시 들리겠지.
​그 생각 하나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슴을 흔들었다.

​“할미, 나 미국 간대.”
손녀가 무겁게 말을 꺼내면
“우리 벌써부터 슬퍼지니까... 그 얘기는 하지 말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막았고, 우린 그 말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그렇게 남은 기간을 우리는 검은 구름 속에 갇혀 지냈고, 저녁마다 작별 인사를 나눌 때면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딸네 집에서 돌아오는 길,
횡단보도 앞에 멈춰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눈물이 흘렀다.

​딸네 집에서 우리 집까지, 길지 않은 그 거리 위에
발길이 닿는 곳마다 눈물이 자국처럼 흩뿌려졌다.
손녀와 손잡고 수없이 거닐던 그 길은
벌써 추억이 되고, 슬픔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이 커다란 빈자리를 무엇으로 메워야 할까.
내 삶에서 손녀를 쏙 빼버리고도, 과연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에이, 괘씸한 것들.
내 앞에 핏덩이를 데려다 붙여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선 쏙 빼가다니.

.

.

.

​태어나서부터 줄곧 내 곁을 지켜주던 손녀가 엊그제, 미국으로 떠났다.
그 빈자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커다란 슬픔은, 대체 무엇으로 덮어야 할까.
그 물음이 마음속을 오래 맴돌던 어느 날,
나는 조용히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리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미리 ‘브런치’라는 방공호를 만들어 둔 것이다.
나에게는, 든든한 방공호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 방공호가 바로, 브런치다.

그게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진짜 이유다.

​수시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고 마음이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나는 얼른 이 방공호 안으로 몸을 숨기고 가쁘게 숨을 고른 후, 다시 일어서려 한다.

​커다란 슬픔은, 사실 완전히 막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해보려 한다.

​글을 쓴다.
마음속 슬픔과 그리움을 그대로 꺼내어 종이에 옮긴다.
기억을 돌보고, 함께 웃던 순간들을 자주 떠올린다.
다시 한번, 곱게 안아본다.

​작은 일상 속에 몸을 담근다.
천천히 걷고, 밥을 짓고, 햇빛을 느낀다.
별다를 것 없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들 속에 나를 놓아본다.
그저, 예전처럼.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댄다.
“나 너무 슬퍼”
그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큰 구멍은 쉽게 메워지지 않겠지만 그 가장자리에 작은 꽃을 심는다.
그 꽃그늘 아래서 잠시 숨을 고르다 보면,
언젠가는 이 슬픔도 조금은 옅어질 거라 믿어본다.

​그렇게라도,
오늘을 건너본다.

.

.

.
손녀가 떠나기 전날은,
사위와 딸, 손녀가 모두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남편과 나는 공항에 가지 않았다.
그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새벽부터 손녀를 보내고 돌아와 손을 씻으러 욕실에 들어서니, 돌아앉은 비누통이 눈에 들어온다.
손녀가 방향을 바꿔놓으며 마지막으로 만졌던 비누통이,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하다.

​"할미, 나 없이도 괜찮아요?"

​“아니...” 대답하는 순간,

순식간에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주방으로 가니,
식탁 위에 놓인 손녀의 물컵과 숟가락이 말을 건다.

​“우린 이제 버려질 거니?”

​“몰라...”라고 말하려는 찰나,

또르르 눈물이 먼저 굴러 떨어진다.

​슬픔은 물건을 타고도 온다.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손녀의 흔적이 아직, 집 안 곳곳에서 나를 부른다.

​툭하면 눈물이 터지는 나를 보며,
눈치 없는 하라방은 또, 원론적인 소리를 꺼낸다.

“지금까지 애들이랑 가깝게 지낸 게 드문 경우지.
다들 자식이랑 떨어져 살면서 그리워하잖아.
그동안 운 좋게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거야... 어쩌고저쩌고...”

​그걸 내가 몰라서 슬퍼하겠냐고요.
언제 내 감정을 정리해 달랬어요?
그냥, 하라방 책상 정리나 잘하시라고요.
흐르는 내 눈물을 굳이 가르치려 들지 말고.

​“나도 슬퍼.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고요.

나는 슬픔을 설명받기보다 말 대신, 곁에 같이 있는 조용한 숨결 하나면 된다.
그냥, 지금은 슬퍼할 시간이다.
이 감정은, 흘러가도록 두려 한다.
지금은 그저, 이 슬픔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언젠가, 조금 덜 아플 날이 오기를 바라며.

할미가 아프다 하니 손녀가 만들어준 약


떠나기 전날, 내 사랑과 커플티를 사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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