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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가 왕자로 변신하기를

달에게 비는 소원

by 연글연글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우리 부부에게 올해처럼 조용한 추석은 처음이다.

손녀가 떠난 지 두 달 남짓.
그곳에서 적응 잘하고 있는 손녀는 그곳이 너무 재밌어서
할미 하부지는 보고 싶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기는 싫다고 한단다.

​다행이다.
이제 손녀 걱정은 접어두고,
나 역시 재미있는 것을 찾아 나서면 된다.

​그동안 갑자기 덮쳐오는 방대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고,
앞으로의 시간들도 새롭게 나누어 짜 보았다.

정답도 없고, 실패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
나는 재미있게 살고 싶으니까.

​손녀가 떠난 뒤, 내 관심은 달랑 하나 남은 남편에게 쏠렸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관심’은 곧 ‘관찰’이라는 불편함으로 변질되었고
애매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내 관찰 대상이 되면서
나는 하루 24시간 남편을 샅샅이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이란 얼마나 많은 모순을 품고 살아가며
순간마다 얼마나 변화무쌍한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 남편은 소파에 앉는 순간 척추가 연체동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르게 앉아 있는 모습을
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늘 중학교 과학 시간, 첫 해부 실험을 떠올리게 한다.
해부대 위에서 허연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던 그 개구리처럼,
남편은 소파 위에 그와 같은 포즈로 누워 있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때의 과학실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또 하나 이해되지 않는 모순은 '물'에 관한 것이다.

주방에 들어가면 남편은 언더싱크 정수기의 물을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냉침차를 마실 때도 정수기 물은 거들떠보지 않고, 꼭 내가 보리차를 끓여 식혀놓은 물만 쓴다.

때문에 나는 물을 끓여 식히는 일을 더운 여름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정수기 물로 타마시면 간단할 일을 말이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그렇게 타서 마시는 냉차에
얼음을 수북이 넣어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그 얼음은 다름 아닌 정수기 물로 만든 얼음인 것을.
정수기 물은 싫다면서,
왜 정수기로 만든 얼음은 그렇게 많이 먹는 걸까.

​그리고 남편이라는 존재가 시도한 ‘시간 차 공격’의 실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젊은 시절 그렇게나 의지되고 다정했던 남편은,
과중한 업무에, 술이라는 사회생활에, 출장이라는 물리적 거리에 늘 묶여 있었다.
나와 아이들에게 남편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남아 있었다.


"아빠, 내일 출장 가?" 그 한마디는 늘 아이들의 안타까움이었다.

​그 부족했던 시간을 이제야 메우려는 것일까.
24시간을 함께 붙어 지내는 날들이,
이제는 햇수를 넘어 넘쳐나게 쌓이고 있다.

​원할 때는 만족과 행복이 되지만,
지금처럼 적당한 거리가 더 편안한 나이에는
이런 타이밍의 실패가 인생의 씁쓸한 숙제가 되기도 한다.

​39년을 함께한 부부, 더 이상 설레는 이성은 아닐지라도
서로에게 편한 사이라는 점은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무 쉬운 사이가 되어버리는 건 기분이 별로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 같은 부부라 해도,
단정한 차림과 반듯한 자세,
그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눈빛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나는 옆에 앉은 남편의 불편한 모습들을 참아 본다.
그리고 올해 보름달에게 비는 소원은 이것이다.

​우리의 삶이 오래도록 아름답고 격조 있는 우정으로 이어지기를.

​다만, 그 우정 속에
소파에 앉을 때만큼은 조금만 더 반듯한 허리도 함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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