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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글부글, 내일은 니글니글

by 연글연글





적막이 흐르는 집 안.
남편과 나는 용케도 서로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만 골라 다니며, 부딪히지 않으려고 종종거린다.
그 모습이 꼭 오래된 사무실에서 동선을 피해 다니는 동료 둘 같다.

그러고 보면, 은퇴 부부의 생존 기술이란 것도
이런 작은 동선 관리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루 종일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면,
궁금하지도 않던 사소한 못마땅함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조심했건만, 오늘도 결국 한 판 붙고 말았다.

부부싸움에는 나이도, 인격도, 성별도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 싸움은 초딩 둘의 말싸움과 다를 게 없다.

싸움의 원인은 늘 비슷하다.
바로 ‘퉁명스러운 서로의 말투’.
이게 불씨가 되고,
내용은 유치 찬란하고 치사한 짬뽕 그 자체다.

말하자면, “누가 더 많이 참았냐”의 대결이다.
남편의 “내가 참는 거다!”가 먼저 버럭 튀어 오르면
나는 “내가 훨~씬 더 많이 참는다니까!”로 바로 치고 들어간다.
이쯤 되면 우기는 것도 이제 경쟁 종목이다.

그런데 오늘은 예상치 못한 공격 포인트가 등장했다.
바로 ‘식사 메뉴’.

매운 음식, 찌개, 탕을 잘 못 먹는 나 때문에
자기는 먹고 싶은 걸 못 먹고살았다는 것이다.

남편은 은퇴하고 나서는 함께 밥 먹을 사람도 딱히 없으니
그의 식사 파트너는 사실상 나 하나였다.
그러니 결국, ‘그래서 못 먹었다’는 말인 모양이다.

그 말이 나오자,
그동안 달게도 쩝쩝 잘만 먹던 남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때 웃으면 내가 진다.
입술을 꼭 깨물고 조용히 삼켰다.)

더구나 내 기억엔 늘 남편이 찜한 식당으로
부지런히 끌려다니기만 했던 것 같은데.

어쩌랴.
중년의 기억력은 서로에게 불리한 쪽으로
슬그머니 이동하는 치사한 편법을 쓰곤 한다.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생활이란 결국
‘서로 다른 기억을 어떻게든 화해시키는 기술’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만의 룰을 만들었다.
월·수·금 과 화·목·토로 메뉴 선정자를 딱 나누는 것이다.
그날만큼은 토 달지 않고, 무조건 정해진 메뉴를 먹는다.
먹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거나,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남편이 메뉴 대장이었던 오늘은 끌려나가서
매운 동태탕을 먹고 왔다.
지금 내 배는 부글부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내일은 드디어 내 차례다.
메뉴 대장, 바로 나다!

그동안 나도 남편 때문에
말없이 포기했던 스파게티.
이제는 당당히 외칠 수 있다.

부부란 이렇게 위장부터 다른 존재다.

내일 점심 메뉴는 스파게티다.
그것도 아주 니글니글하고,
먹다 보면 괜히 멜랑꼴리해지는 농도의 진한 까르보나라로.

치사한 남편아, 각오해라.
내일은 당신 위장이 시험받을 차례다.
까르보나라의 진득한 밀도가
당신의 중년 위장을 부드럽게 감싸주기를...
아니, 그냥 한 번 그 콤콤함에 빠져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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