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2.9kg의 건강한 여자아이가 귀여운 울음소리와 함께 태어났다. 그 집에는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오빠가 있었고 두 번째 손주이면서 첫손녀딸의 탄생에 모두가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얼마나 사랑을 받았었는지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날에는 온 일가 친척들이 집에 모여 아이의 생일파티도 열어주기도 했다. 그 여자아이는 어찌나 개구쟁이였는지 아주 말도 못한다. 우선 엄마 따라 간 마트에서 진열되어있던 빵들도 시식코너인줄 알고 한 조각씩 모두 뜯어먹었다. 뒤늦게 돌아본 엄마가 놀란 눈으로 한숨을 쉬며 모든 빵을 다 사기도 했다. 또 동네 아이들과 모여 각자의 부모님 차에 올라가 놀이터에서 가져온 흙모래를 가지고 모래성을 쌓다가 자동차 앞창, 뒤창에서 미끄럼틀을 타며 놀아, 후에 부모님들이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또한 세 살때,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 타는 자전거를 꼭 타겠다며 조르고 졸라서 자전거도 얻어냈다. 일년이나 지나서야 발이 땅에 겨우 닿을정도였지만 말이다. 네 살땐, 무작정 피아노를 치고싶다며 피아노 학원을 가게 된다. 동네 최대 규모의 피아노 학원의 최연소 등록 원아였다. 매일 유치원 하원을 피아노 학원에서 하고 학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놀다가 선생님과 함께 문을 닫고 집으로 나섰다. 선생님께서 어린이집 역할까지 하느라 힘이 드셨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그땐 미처 못 했다. 여기까지는 5살 이전의 이야기이니 골치 아프더라도 웃어 넘겨주시길 바란다.
초등 학교 때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그 시절 ‘핵인싸’라는 표현을 붙이면 될 것 같다. 매일 학교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가 쉬는 시간엔 복도에서 친구들에게 빌려주며 한 번 씩 타게 해줬다. 덕분에 학교에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학교에 오면 안 된다는 가정통신문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공부는 또 얄밉게 잘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영재교육 관련 공부를 하실때 실험쥐가 되어 최후의 4인으로 끝까지 어려운 과제를 하게 된다. 추억의 카키색 단복을 입은 걸스카우트 활동도 오랫동안 했다. 스카우트 담당 선생님을 잘 만나 미군부대 견학, 해외여행도 갈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첫 시험에서 당당히 전교 등수를 따냈다. 공부’도’ 잘하는 반장 생활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때도 비슷했다. 또 수능 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일가친척들, 부모님 친구들, 심지어 동네 사람들까지) 응원(또는 용돈)을 받았는지 그 사랑은 하늘을 찌르고 나갔다. 어찌 저찌 취업잘된다는 학과에 진학해 취업도 덜컥 했다. 월급으로 한 턱 내는 것도 참 잘했다. 가족들에게는 현금선물이 최고였지만 말이다. 쉬는 날이 생기면 무조건 여행을 갔다. 48시간 해외여행도 떠나보았고, 당일 비행기표를 찾아 무작정 제주도로 출발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사람들은 이제는 커버린 아이에게 말한다. “너는 정말 행복해보여. 걱정 없이 살 것 같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어?” 큰 아이는 답한다. “그래? 별거 아니야.” 그럼 지금부터 그렇게 살 수 있는 진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배산임수가 완벽한 서울에서 나름 살기 좋은 동네라고 하는 동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을 만들었다. 우리집이 할머니 집으로 들어와 합쳐지기 전에는 다른 곳에서 잠시 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4살 이전의 일이니 그 전의 기억은 많지는 않다. 이 좋은 동네에는 친구들의 집에 가면 그랜드 피아노가 놓아져 있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녀왔다며 그 시절 흔히 보기 힘들었던 외국 과자들을 선물로 나눠 주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한 학년을 마칠 때마다 누군가는 이민을 갔다, 유학을 갔다는 소식은 아주 잦게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 집에 들어오기 전, 우리 집은 IMF때, 잘나가던 대기업을 자진해서 그만둔 아빠, 결혼 후 일을 그만 둔 전직 치위생사 엄마,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네 살 많은 오빠, 그리고 막내딸 이렇게 단란한 네 식구였다. 오빠가 창밖으로 떨어뜨린(집은 2층이었고, 장난감은 아파트 화단에 항상 떨어졌고 너무나 다행히 아무도 맞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언제나 뛰어나가 장난감들은 주워오는 당번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무튼 그 아이는 장난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또 몸이 약한 오빠가 새벽에라도 병원에 가야한다고 깨우면 어린 아이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양말을 뒤집어 신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는 집을 따라 나섰다. 그런 아이는 어쩔 수 없이 가끔은 옆집, 윗집, 아랫집에 맡겨지는 날도 있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아이에게 주돌봄자가 필요할 것 같다는 판단으로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할머니집은 마당도 있고, 아이와 동갑내기인 족보 있는 진돗개 ‘백구’도 있고 아이의 놀이터가 되었던 옥상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위해 마당에 그네, 솜사탕 기계도 만들어줬다. 유투브도 활성화되기 전의 시절인데 가히 한국의 맥가이버라 칭한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증조할머니는 모기에 잔뜩 물린 아이의 다리에 당신께서 피우던 담배의 담뱃재를 발라주기도 했다. 조선시대 이야기는 아니다. 21세기를 사는 20세기 초반 태생의 극약처방이었으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아이는 곧 초등학교라는 조금 큰 세상에 나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 아이들이 모두 친구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의 친구와 다툼이 있었는데, 같은 학교에 3학년에 다니고 있는 언니를 데려왔다. 치사하게 말이다. 나도 지지 않았다. “나도 오빠 있어. 우리오빠는 4학년이야!” 오빠를 데려오라고 했다. 오빠는 올 수 없었다. 어린 아이와는 다른, 어쩌면 훨씬 좋은 특수학교에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아이는 ‘다름’을 느끼게 되었다. 아이는 간신히 눈물을 참고 동네에서 가장 큰 당구장을 하던 엄마에게 달려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모든 것을 일러바친다. 아이보다 더 가슴이 아픈 엄마는 오히려 아이를 혼냈다. 왜 눈물을 달고 다니느냐고. 아이는 생각했다. ‘절대 울지 말아야겠다.’ 어디선가 오빠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오면 혹시라도 눈물이 나올까 숨어버렸다. 덕분에 남 앞에서 잘 울지 않는 씩씩한 어른이 되었다.
언젠가는 친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백화점의 ‘플레이타임’이라는 곳에 데려가 주셨다. ‘플레이타임’은 처음이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풍경이었다. 오빠 학교에서 동생들이 엄마를 따라와 놀던 ‘놀이치료실’과 비슷한 놀이기구들이었다. 다름이란 걸 알고 난 후 사귄 친구들에게는 아이는 완벽히 포장해나갔다. 그 포장지는 해가 갈수록 두꺼워지고 아이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갔다.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지만 아무도 모르게 가식적인 사람이 되었다. 아이의 특기는 웃는얼굴 보여주기였다.
그 아이가 더 철이 들어갈 때쯤, 엄마만큼이나 엄마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의 파킨슨병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만큼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치매 진단도 듣게 된다. 의사의 말 한마디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이와 어린 시절 내내 산을 오르내리며 동네 청소를 솔선수범하던 할머니의 젓가락질이 어려워졌을 때, 아이와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러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할아버지가 방금 끓인 라면의 존재를 잊어버렸을 때, 그때 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든 잘 살아야겠다.’ 그 생각 안에서 아이는 방황도 참 많이 했다. 아니, 여전히 하는 중이다. 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괜히 앞에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기도 한다. 보드게임도 함께하고 드라이브도 자주 다닌다.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운 아이는 언제나 최선의 길을 찾으려한다. 사람들에겐 더할 것 없이 행복해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연기실력이 소문난다면 칸의 여왕은 자리는 아마 아이가 차지할 것이다. 어쩌면 간호사가 되기 전부터 간호사였던 그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 고슴도치 가시 같은 하루 하루를 어떻게 길들였는지, 당신과 다음 장으로 함께 넘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