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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경옥 Nov 22. 2021

올리브나무 사이로

학교에서 나와 만난 나의 아이들에게

 18. 인연     

 내게는 한 번도 뵙지 못한 시아주버님이 계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청년 시절에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그 시아주버님의 명함 크기 사진 한 장과 일기장 5권이 있었다. 한 집안의 장손으로, 장손다운 맏이였다고 한다. 형제 중에 가장 잘 생기고 공부도 가장 잘하고 일가친척에게 철마다 문안 편지를 올리는 속 깊은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맏이인데다 밑에 동생도 5명이나 되니 4년제 대학에 보내지 못하고 2년제 전문학교에 진학시켰다고 한다. 후일 부모님이 나의 남편에게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권유하셨다니, 아마도 그때는 그것이 부모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일기장을 읽어보았다. 청년의 꿈과 고뇌와 희망, 슬픔까지도 오롯이 담겨 있었다. 겉으로는 늘 범상한 모습이었다는데 마음속에는 온갖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일기장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진학한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이미 대학생 때 부모님 주선으로 결혼을 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결혼식장에 가서 축사를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 축사도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가 4년제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것을 너무나 부러워하고 있었다. 자기도 언젠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큰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우리 시부모님이 이 일기를 읽으셨다면 참으로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의 가정환경 조사서를 꼼꼼히 들여다보다가 우리 시아주버님의 일기장에서 보았던 그 친구의 이름을 발견하였다. 예전에는 가정환경 조사서에 본적(本籍)도 적었던지라 그분의 고향이 우리 시댁과 같은, 경상도 어느 마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이를 미루어 짐작해 보니 그 친구분 같았다. 

 연락을 드려보니 바로 그분이었다. 그분의 아들이 우리 반에 있었던 것이다. ‘세상이 정말 좁다’ 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이처럼 종종 신기한 인연과 만나게 된다.      


 그날은, 뵙지도 못한 시아주버님 생각을 한참이나 하였다.  

                                                          

 19. 온탕과 냉탕


 처음으로 여학생반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해에는 여학생반 절반, 남학생반 절반, 수업을 맡고 담임으로서는 남학생반을 맡았다. 6년 차에 처음 들어가 본 여학생반은 천국과 같았다. 거의 모두 얌전하게 수업을 듣는다. 수업을 방해하는 개구쟁이도 없고 다들 필기도 열심히 한다. 목소리를 크게 높여야 할 일도 없었다. 숙제도 대체로 깔끔하게 잘 해오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전혀 없었다. 때는 1984년, 까마득한 옛날 일이니 요즘 아이들과도 사뭇 다르다. 여학생반이 천국이라면 남학생반은 지옥이었다. 너무 지나친 표현인가. 아무튼 나는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해요.” “온탕과 냉탕을 오고 가요.” 이런 농담을 하였다.                                                            

 20. 국화꽃 한 송이     

 이제 빈자리 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국화꽃 한 송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사실은 그 흰 꽃 한 송이가 실제로 거기 놓여 있었는지, 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꽃송이인지 불분명하다. 완전히 그 일을 잊고 있었다. 그 일은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해서 마무리할 때까지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편이 그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잊을 수 없는 일이라 오히려 까맣게 묻어두었었나 보다. 

 처음 그 학교에서의 추억을 돌이켜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이들이 검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느 시절의 어느 학교를 회상하더라도 푸른 풀밭에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야생화들처럼 아이들 기억이 돋아나는데 웬일인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몇 가지 기억을 되살려 적어두었다.     


 그날, 여름방학 중이었는데 부고가 날아왔다. 우리 반 태정이가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밝고 명랑하고 활달하고, 여느 중2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웠던 태정이, 그렇게 일찍 가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장례식장에 달려갔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방학 중이라 날도 덥고 해서 온 가족이 한탄강으로 놀러 갔다고 한다. 수영을 잘하는 태정이는 시원하게 강물을 따라 헤엄을 치고 있다가, 물가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던 여대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동동거리는 것을 보았다. 코펠 뚜껑 하나가 물살에 흘러가고 있었다. 태정이는 수영을 잘하니까 자신이 그 코펠을 건져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힘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익사하였다. 겨우 코펠 뚜껑이었는데.

 한탄강에는 곳곳에 소용돌이가 있다. 위험한 강물이다. 거기서 태정이가 죽었다. 믿을 수 없는 이 불행을 오히려 나는 완전히 잊었었다. 그러면서 그 시절의 많은 기억도 묻혔다. 그때 태정이의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오늘 나는 울고 있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21. 복남이 사건

 학년 초 어느 날,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실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검사실에서 온 전화라니, 아무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 않은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일일까.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전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핸드폰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우리 반 복남이가 결석을 해도 연락할 길이 없었는데, 검사로부터 복남이 얘기를 듣게 되었다. 

 복남이의 부모님은 시골 어디선가 농사를 짓고 사시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좀 더 잘 자라고 사회적 성취도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 서울 이곳에 보내놓으셨다. 대학에 다니는 사촌 형과 둘이 자취를 하고 있다. 사촌 형이 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이라니 처음 겪는 대학 생활에 나름대로 얼마나 바쁠 것이며, 대학생이라 해도 여전히 어린 나이인데 어떻게 사촌 동생을 살뜰히 보살필 수 있겠는가.

 복남이가 어쩌다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잘 모르는 일이다. 검사는 시골에 있다는 부모님과 연락이 안 되니, 할 수 없이 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임이 와서 데려가라고 한다. 경찰서도 아니고 검사실이라니.

 검사실에 난생처음 가 보았다. 그 후 지금까지도 다시 간 일은 없다. 검사라면 사법고시에 합격한 대단한 인물인데, 그 검사가 일하는 방을 상상해 본 적은 없지만, 의외로 너무 소박해서 실망하였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캐비닛 두어 개 그리고 방문객이 앉는 길다란 나무 의자가 전부였다. 어쩌면 검사가 일하는 다른 방이 또 있고 그 방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방이었을까. 

 복남이가 황당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참 난처한 광경이었다.

 담임이 책임지겠다면 풀어주겠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책임진다고 할 수밖에. 데려가고 한 달에 한 번씩 복남이의 근황을 서면으로 검사에게 보고하란다. 서울에 보호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담임이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데려오긴 했는데 서울에 사촌 형과 둘만 지내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부모님 곁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부모님에게 연락하여 전학 절차를 밟았다. 검사에게도 부모님 계신 곳의 중학교로 전학을 간다고 알렸다. 

 그 뒤 복남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부모님과, 어렸을 때의 친구들이 있는 그 시골에서 잘 자라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22. 충청도에서 온 아이     

 어느 날 3학년 교실에 들어갔더니 낯선 아이가 맨 뒤에 앉아 있다. 3학년이 되고도 몇 달이 지났는데 전학을 오다니, 드문 일이다. 낯선 학교에 오면 자리 배정에 좀 신경을 써 주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는 상황인가 보다. 중간쯤 가는 키에 평범한 모습의 온순한 인상이고 눈빛이 밝다.

 한 교실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촘촘히 앉다 보면 맨 뒷자리에서는 선생님 소리도 잘 안 들릴 때도 있고,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져 공부하는 데 지장이 있다. 그래서 공부 좀 하려면 다들 앞자리에 앉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맨 뒷자리에 앉은 그 아이는 언제 보아도 반듯한 자세로 흐트러짐이 없다. 

 어디서 온 아이인가 했더니 충청도 공주 근방 어디 시골에서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부라 했는데, 영어 선생님 말씀이 영어 읽기, 쓰기도 아주 잘하고 발음도 매우 좋다고 한다. 시골에서 자랐는데 참 신통하다. 부모님은 그냥 순박한 시골 분이라 영어를 직접 가르치실 수 있는 형편도 아니라고 한다. 

 보통 새 학교로 전학을 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자기 공부 실력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 시험 성적이 내려가기 마련이다. 자신의 자리를 회복하려면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선생님들의 수업방식이나 시험 문제 경향도 다르고, 새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그러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맨 뒷자리에 앉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도 참 신통하였다.  

   

 1학기말 시험을 치렀다. 놀랍게도 그 아이가 전교 1등을 하였다. 1학년 입학해서부터 항상 전교 1등을 맡아 했던 가현이가 간단히 2등으로 밀렸다. 물론 전교 2등도 굉장한 등수다. 그러나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가현이가 2등으로 밀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충청도 어딘가 시골에서 온 저 아이는 도대체 정체가 뭔가. 

 가현이는 결국 남은 기간에도 원래 자리로 복귀하지 못하고 2등으로 졸업을 하였다. 

 시골에서 서울로 잠시 올라왔던 그 아이는 졸업을 하고 공주에 있는 유명한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그 당시 서울은, 서울 시내 중3 학생 중 인문계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연합고사를 치르게 하고, 그 성적순으로 인문계 고등학교 정원만큼 뽑아서 집 가까운 곳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작위로 배정하고 있었다.

 공주의 그 명문 고등학교는 전국의 수재들이, 사는 지역에 상관없이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가는 곳이었다. 전국에 그런 고등학교가 몇 있었다. 

 결국 그 학교로 진학할 거면 공주 근처에서 중학교를 다녔었다는데 서울엔 뭐 하러 왔던 것일까. 우리 학교는 부모의 학구열이 남다른 8학군도 아니고, 서울 변두리에 있던 학교인데, 왜 왔다 간 것일까. 그냥 서울 구경을 해 본 것일까. ‘말(馬)은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그래서 한번 서울에 보내본 것일까. 서울이 어떤 곳인가 구경해 본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궁금하다.   

   

 그 아이가 슬쩍 다녀가는 바람에 가현이에게 깊은 상실감을 주었었는데, 그러나 2등으로 밀려본 가현이의 그 경험은, 겪어보아야 할 중요한 인생 경험이기도 하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것처럼, 가현이는 아마도 그 일로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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